백낙천 교수 |
세종은 1397년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18년에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1450년에 승하할 때까지 33년 동안 재위하였다. 세종은 장영실 등 과학자들을 독려하여 측우기를 비롯하여 혼천의, 앙부일구 등 많은 과학기구를 발명케 했으며, '농사직설'과 '세종실록지리지' 등 국가의 경제 활동에 꼭 필요한 서적들도 많이 만들어 냈다.
또한 박연으로 하여금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 궁중 음악인 아악을 정리하게 한 것도 학문과 예술에 대한 세종의 남다른 열정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국방에서는 최윤덕, 김종서 등을 앞세워 압록강 주변에 4군을 설치하고 두만강 주변에는 6진을 개척했고, 이종무를 통해 대마도 지역의 왜구들을 무찌르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는 등 영토 확장에 힘썼다. 또한, 고려 인종 때 만들어진 학문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확장하여 국가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니, 세종은 집현전을 국가의 '싱크탱크'로 삼아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등의 인재를 양성하고 서적을 편찬하여 집현전을 학문과 정책 수립의 장(場)으로 정립하였다.
한편 세종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도 많이 겪었던 임금이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이듬해인 1444년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을 잃고 1445년에는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을 잃었다. 더욱이 처족(妻族)인 소헌왕후 가문이 부왕인 태종에 의해 풍비박산되었으며,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6개월 전인 1446년 음력 3월에는 아내인 소헌왕후마저 잃은 안타까운 가족사를 가슴에 묻고 산 임금이기도 하였다.
세종은 '맹자'에 나오는 '발정시인(發政施仁)'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아 백성을 사랑하고 어짊을 베풀어 백성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신하들과 토론을 통해 국가 정책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으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백성을 본위로 한 왕도정치를 베풀었다. 무엇보다 세종은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재상 허조를 곁에 두고 국가 경영을 담당할 인재 시스템 관리를 촘촘하게 펼쳐 나갔다. 이러한 유교 국가의 체계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시급한 국가 과제 중 하나는 백성을 교화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1428년(세종 10)에 진주의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세종은 효행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펴내 백성들에게 읽히고자 군신·부자·부부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 각 35명씩 105명을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삼강행실도'의 간행을 명하여 1434년 편찬하였다. 물론 '삼강행실도'는 세종의 통치 철학을 반영한 결과이지만 한문으로 편찬하여 당시 백성들이 읽을 수가 없다 보니 효자, 충신, 열녀의 교훈을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따랐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나온 세종의 역작이 훈민정음 곧 한글의 창제이다. 즉, 세종은 한글을 만들어 백성들이 깨우쳐 알게 되고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하면 효자, 충신, 열녀의 이야기를 통해 교화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즉, 한글의 창제는 학문 정진에 힘을 쏟은 결과이며, 세종의 업적 가운데 최고 정점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세종은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았고, 문화를 숭상하여 백성의 교화에 힘썼으며, 국방을 강화하여 나라의 평안을 꾀하였고, 널리 인재를 양성하고 등용하여 국가의 정책 비전을 구현하였으며, 경연(經筵)을 국가 통치의 공론장으로 삼아 어진 정치를 펼친 위대한 성군이었다. 한글 반포 577돌을 맞아 성군 세종을 기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 10월의 어느 날이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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