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도 다르지 않았던 것일까? 겸제 정선의 화첩 중에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정선, 1746년, 종이에 먹, 22.0×32.3㎝, 보물 585호, 삼성문화재단 소장)이 있다. 퇴우는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을 합하여 붙인 말이다. 두 선생의 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다. 퇴계의 글은 가정(嘉靖) 무오년 4월(=명종 13년, 1558)에 쓴 <회암서절요서(晦庵書節要序 또는 주자서절요서>로, <주자서절요>는 퇴계가 방대한 주자대전을 섭렵하고 그 요체만 묶어서 낸 책이다. 우암의 발문은 2편이 실려 있다. 진사 박자진이 선생의 초본을 가지고 와서 무봉산(舞鳳山)에 있는 자신에게 보여주어 완상하게 해주었음에 감사하고, 잘 간수하여 왔음을 칭찬하는 내용이다.
박자진은 정선의 외할아버지이다. 조정육 저 《붓으로 조선 산천을 품은 정선》에 의하면 정선은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연로하신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과 함께 살았다. 당장 끼니 걱정할 정도로 어려웠다. 이때 가정의 기둥이 되어주고 바람막이가 되어준 분이 외할아버지이다. 정선의 둘째 아들 정만수의 발문에 의하면 <주자서절요서>는 기이하게도 외손으로만 전하여져 자신의 집안으로 오게 된다. 원래 퇴계가 쓴 글은 그의 손자 이안도에게 전하여진다. 이안도는 외손자 홍유형에게, 홍유형은 사위 박자진에게 준다. 박자진은 거기에 우암의 발문을 받는다. 그것을 정선의 아들 만수가 진외가로 가서 재종형인 박자진의 손 박종상을 설득하고 간청하여 받아온다. 대대로 뿌리 찾기에 온갖 정성 다하고,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박자진은 외손으로 이어져 왔지만 퇴계의 후손임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며, 또한 학맥으로 이어진 우암의 발문을 받기위해 수원 만의촌으로 2번이나 찾아간다. 이로써 성리학의 두 대가 진적 소유주가 된다. 얼마나 자부심이 충만하고 영광스러웠으랴. 그것이 겸제의 집으로 전하여 지니, 그 또한 얼마나 기뻤겠는가? 자신에게 전하여지는 과정을 그림으로 그린다. <계상정거(溪上靜居)>는 퇴계가 <주자서절요서>를 짓고 있는 도산서당 일원의 모습이다. <무봉산중(舞鳳山中)>은 은거하던 우암에게 박자진이 두 번이나 찾아가 발문을 받는 수원 무봉산 자락의 광경이다. <풍계유택(楓溪遺宅)>은 정선의 외조부 풍계 박자진의 거처이다. <인곡정사(仁谷精舍)>는 정선 본인의 집이다. 정선의 나이 71세였다.
이외에도, 서문을 대신하여 겸제가 친구인 사천 이병연에게 부탁, 받은 제시가 있다. 고종 9년(1872)에 고산 임헌회가 소유하여 몇 마디 덧붙이고, 영운 김용진의 제서 등이 첨가되어 오늘날 서화첩이 되었다. 총 16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계상정거>는 2007년 천 원짜리 지폐 뒷면에 인쇄되어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다.
2012년 9월 11일 보물로는 처음으로 K옥션 경매에 나와, 34억에 낙찰 된다. 국내 고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 퇴계와 우암의 진적은 물론, 겸재의 필력이 최고 경지에 다다른 시점에 그려진 작품이기 때문이리라. 소유권 변경 신청은 삼성문화재단이 하여, 2012년 11월 5일 보물 지정서가 재교부 되었다.
화면의 앞과 왼편엔 강물이 펼쳐져 있고, 기암괴석 위에는 노송이 자리하고 있다. 그 사이에 집이 몇 채 보이고, 집 뒤로 나지막한 산이 좌악 펼쳐진다. 가운데 집 방안, 머리에 사방관 쓰고 도포 입은 선비가 앉아 글을 쓰고 있다. 바로 퇴계이다. 위대한 학자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라서 일까, 어딘지 위엄 있고 엄숙한 느낌이다.
누군가 흠모할 사람, 본이 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의 사언행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은 더 큰 행복이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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