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차에 천안 사는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주말에 1박 2일로 제부도 가자고. 연휴 전에 친구 엄마가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친구 남편들도 만났다. 결혼식 때 보고 처음이었다. 머리가 희끗거리고 얼굴도 주름이 잡혀있지만 다들 편안한 분위기였다. 고향이 서산인 용인 사는 친구가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대학 다닐 때 난순이 네가 나한테 창문 열면 바다 보이냐고 물어본 거 기억나니?" 내가 그랬나? 천안 친구 남편은 "집사람이 내내 슬퍼하고 기운이 없었는데 친구분들 보고 얼굴이 좀 밝아졌네요"라며 고마워했다. 친구 어머니도 치매를 앓고 계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거였다. 황망한 친구는 얼굴이 반쪽이 돼 초췌했다. 죽음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은 통과의례다.
천안 친구 부부는 답례로 제부도 펜션을 예약해 바비큐 파티를 준비했단다. 제부도. 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거기다 바비큐 파티라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의사는 말렸다. 아직 치료 중인데 바닷가 찬 밤바람이 도움이 안 될 거라며. 아, 밤하늘 아래 빨간 숯불 위 석쇠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와 가리비를 생각하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비릿한 바람을 맞으며 먹는 고기는 얼마나 맛있을까.
그날 밤 아쉬움을 달래며 이불 속에서 책을 읽다 무심코 방구석을 보았다. 뭔가 반짝였다. 일어나 다가가 보니 비닐조각이었다. 만지자마자 부서졌다. 하도 오래돼서 삭은 것이다. 어디서 떨어진 거지? 손으로 쓸어 담는데 뽀얀 먼지도 도톰하게 묻어났다. 맙소사! 록 그룹 '캔사스'가 인생은 먼지와 같은 거라고 노래했지만 이건 너무 한 것 아닌가? 다음날 오전 병원에 갔다와서 소매를 겉어붙였다. 내 집의 먼지란 먼지는 다 쓸어버리리라! 냉장고 위 먼지는 융단처럼 두툼했다. 희뿌연한 거실 창문을 닦자 밖의 풍경이 또렷했다. 벽지와 방문도 의자를 놓고 위에까지 다 걸레질 했다. 이런 대대적인 청소는 입주 후 처음이다. 다음날까지 청소는 계속됐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손은 사포처럼 거칠어졌다.
두 번째 날 점심은 김칫국을 끓였다. 새콤한 묵은지를 썰어 찌개용 돼지 앞다릿살을 넣고 푹푹 끓였다. 다른 건 필요없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 대신 김치와 고기가 훌륭해야 한다. 대접에 가득 푼 다음 뜨거운 밥을 말아 정신없이 퍼 먹었다. 막힌 코가 뻥 뚫리고 가래도 삭아 없어진 것 같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을 들이마셨다. 몸이 개운했다. 오래된 먼지와 함께 내 몸속의 묵은 찌꺼기도 싸악 씻겨나간 기분이다. 신문사에 갓 입사했을 당시 당진에서 국어교사 생활을 하는 과 후배가 놀러와 다음날 아침 이 김칫국을 끓여줬다. 후배는 고기 누린내가 나지 않겠냐며 미심쩍어 했다. 막상 먹어보더니 "어머, 언니 너무 시원하고 맛있어"라며 한 대접 뚝딱 비우고 더 달라고 했다. 김칫국은 요즘도 종종 끓여먹는다. 단순해서 담백한 김칫국. MSG를 마구마구 친 음식은 속이 거북하다. 사람도 김칫국처럼 솔직 담백한 스타일이 좋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지방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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