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옴므 고개부터 오늘 숙소인 치즈 팩토리 산장까지 하강 거리는 6㎞, 고도차는 700m다. 경사도가 20%를 넘는 구간이 많아 발목과 무릎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지만, 이 또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가이드 실비가 우리의 고충을 이해했는지 해발 2000m 지점에서 개울을 만나자 등산화와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갔다. 일행도 주저하지 않고 실비를 따라 했다. 이 계곡물은 본옴므 고개 동쪽 빙하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남쪽으로 흘러 내려가 라자 하천(Ruisseau de La Raja)을 이룬다. 차가운 계곡 물은 실핏줄이 잔뜩 터졌을 발목과 무릎의 통증을 식혀줬다. 도로 사이클 대회에서 너덧 시간 동안 장거리를 달려온 선수가 근육통을 가라 앉히고 다음날 레이스를 준비하기 위해 얼음물을 채운 간이 에어 풀장에 몸을 담그는 장면이 떠올랐다.
냉수마찰은 효과가 탁월했다. 6시간 만에 꽉 조인 등산화에서 해방된 맨발이 산소호흡을 하면서 보송보송 생기를 되찾았다. 현명한 트레커는 이럴 때를 대비해 갈아신을 울양말을 챙겨간다. 막바지 구간인 해발 1800m 지점까지 내려오자 왼쪽으로 라자 산장(Chalets de Raja)이 보이면서 곧바로 아스팔트 도로가 이어졌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투르 드 몽블랑 최남단 마을인 레 샤피외(Les Chapieux)가 나온다. 오늘 최종 목적지인 치즈팩토리 산장은 오른쪽 도로를 따라 2㎞ 더 가야 한다. 이 도로명이 D902번 도로, 코르메 길(Route du Cormet)이다.
'아, 이 도로를 3일 전에 왔더라면 버킷리스트 하나가 자연스럽게 해결됐을 텐데…'.
해발 2000m안팎의 몽블랑 둘레산길 고원에서 풀을 뜯는 라콘느(Lacaune).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키우는 양의 한 품종이다. 라콘느 우유는 단백질 함량이 높아 치즈를 만든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투르드프랑스가 종반전으로 치달을 때 스위스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으므로 첫날 우리를 프랑스 레주슈까지 태워준 운전기사에게 대회 상황을 물었다.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장황하게 과정을 설명했다.
본옴므 고개에서 하산하는 길. 트레커를 중심으로 한 시 방향으로 멀리 보이는 산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걸쳐있는 해발 3127m의 레쇼산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어로는 'Punta Lechaud'.(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대회 기간 최강의 레이서들을 관전하기 위해 코스 주변에는 자전거를 타고 온 동호인이나 캠핑카를 타고 미리 명당자리를 점찍어 둔 열성팬들로 북적인다. 질서 유지를 위한 스태프들이 있지만 일부 열성팬들은 함성과 함께 선수들의 등을 두드려주거나 뒤쫓아 달려가면서 손뼉을 쳐주는 진기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가끔 황당한 사고가 터지기도 하지만 일부 관객들의 일탈에도 참가 선수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투르 드 프랑스, 이탈리아의 지로 디탈리아, 스페인의 라 부엘타 등 세계 3대 도로 사이클 경기를 기점으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도로 사이클 대회를 앞다퉈 개최하고 있다.
멀리 캠핑장이 보이는 마을이 레 샤피외(Les Chapieux)다. TMB코스의 최남단이다.(사진=김형규 여행작가) |
일행은 치즈 팩토리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샤워 순번을 정하고 빨랫감을 챙겼다. 선순위로 샤워실에 들어간 딸이 다급히 엄마와 아빠를 찾았다.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산장은 지붕에 설치된 패널 한 장으로 태양열을 모아 실내전등을 켜고 보일러를 가동했다. 태양열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온수가 5초 정도만 나오고 그 뒤로는 산골짜기의 차가운 계곡물로 돌변했다. 실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일러를 점검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전등은 조도가 무척 낮아 눈이 침침해지고 핸드폰 충전도 하세월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희한한 하룻밤을 그렇게 보냈다./김형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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