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의 젓갈식당 |
충남 논산시 금호고속에서 내리면 그 옆 버스정류장에서 강경 가는 101번 시내버스가 있다. 19일 '강경젓갈축제' 개막식이 있다고 하는데, 비가 오는 탓인지 축제 분위기 뜨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강경과 광천의 젓갈시장은 누가 오라 하지 않아도 김장철을 앞두고 장사진을 이루는 곳이다. 강경은 금강의 중류와 하류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강경천과 논산천이 본류와 합류하는 지역으로서 수륙 간 교통의 요로에 해당되고 수운이 잘 발달한 천혜의 내륙항인 강경포구가 형성됐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풍석(楓石) 서유구(1764~1846)가 펴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강경포 어선들은 청어와 조기를 많이 잡았고 소금이 많이 생산돼 다른 지방과 교역하였는데, 상품으로는 '어염(魚鹽)'을 많이 거래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어염'은 소금에 절인 생선 즉, 젓갈을 지칭한다.
강경의 젓갈시장 |
정조 23년(1799) 5월 9일 호서의 암행어사 신현(申絢)이 복명(復命)하고 서계(書啓)와 별단(別單)을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은진(恩津)의 강경(江景)이 호서의 제1 도회지(都會地)이고 결성(結城)의 광천(廣川)이 그다음입니다. 강경은 양호(兩湖)의 사이에 있으며 민호(民戶)는 1천 4, 5백쯤이고, 광천은 세 읍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민호는 5, 6백쯤입니다. 토지는 비옥하고 배와 수레가 집합하여 어염(魚鹽)은 달리 구입해 오지 않아도 풍족하니, 이 때문에 얼어 죽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으며 천금(千金)을 가진 집이 있습니다. 풍속으로 말하면 광천의 풍속이 강경보다 후하며, 부유함으로 말하면 강경이 광천보다 더 부유합니다.
그런데 상인이 이미 많아서 아주 조그마한 이익을 다투다 보니 부유하긴 하나 풍속은 순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근래 두 곳에서 나오는 이익이 예전만 못한데, 성상께서 지성으로 진념하여 폐단을 특별히 하문하시고 아울러 폐단을 바로잡을 대책을 찾아보도록 하셨습니다. 신이 이곳에 급히 이르러 자세하게 탐문하니 다음과 같습니다. 강경은 이성(尼城)·논산(論山)과 포구는 같지만 길은 다릅니다. 강경은 포구가 깊어 선박이 드나들기 편하며 논산은 여울이 져서 배를 운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선척이 모두 강경에 모여들어 그 이익을 독점하고 논산은 자그마한 선척이 간간이 와서 정박할 뿐입니다.
그런데 최근 물살에 곧바로 부딪혀서 논산의 포구가 강경처럼 깊고 넓게 되자 논산의 백성들이 간혹 뱃길을 막고서 왕래하는 크고 작은 선척을 이따금 유인하는 일이 많아, 논산의 포구에 정박하여 강경의 이익이 점점 예전만 못한 형편입니다. 그리하여 두 포구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서로 영읍(營邑)에 송사를 제기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논산의 백성이 논리가 밀렸으나 마침내는 강경의 백성이 패소하였습니다. 강경의 백성은 '우리는 응역(應役)하는 일이 대단히 많고 선척의 왕래는 원래 정한 주인이 있을 뿐인데, 어찌 우리의 이익을 빼앗아 갈 수 있는가' 하고, 논산의 백성은 '선척의 왕래는 편한 대로 멈추어 정박하는 것이고 원래 정해진 곳이 없을 뿐인데, 어찌 그 이익을 독차지할 수 있는가' 하였습니다. 그들이 다투고 힐난하는 것이 대략 이와 같은데, 은진이 읍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태반이 강경 덕분이어서 군정(軍丁) 700명이 필요한 물품을 이곳에서 가져다 마련하고 기타 감영에 바치는 것이나 고을에서 쓰는 것으로 불가피한 것은 으레 이곳에서 징수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점차 그 이익을 잃게 되어 응역(應役)할 방도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논산은 새로 얻은 이익인 만큼 정말 그야말로 본래 나의 땅이 아닌 것이니, 관계된 바가 실로 크지 않습니다. 지금 강경이 예전을 회복하고자 하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전처럼 사업을 독점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듯합니다. 광천은 풍속이 순후하고 이익도 점차 넓어져서 민호와 인구가 증가하기만 하고 줄지는 않아 달리 폐단이 되는 단서가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일성록(日省錄)』
이처럼 호서의 암행어사 신현(申絢)은 강경이 호서 제일의 도회지라 했고, 광천이 그다음이라 했으며, 토지는 비옥하고 배와 수레가 집합하여 어염(魚鹽)은 달리 구입해 오지 않아도 풍족하니 이 때문에 얼어 죽고 굶주리는 사람이 없으며 천금(千金)을 가진 집이 있다고 정조 임금에게 계를 올렸던 것이다.
정조임금이 직접 쓴 『홍재전서(弘齋全書)』 제41권에도 정조(正祖)가 충청도 암행어사 신현(申絢)에게 내리는 봉서에 "은진(恩津)의 강경(江景)과 결성(結城)의 광천(廣川)은 곧 호서의 도회지(都會地)이다. 물고기와 소금이 산출되고 배와 수레가 몰려들므로 백성은 부유하고 풍속이 돈후하여, 예로부터 낙토(樂土)라고 불리어 왔는데, 근래에는 점점 예전만 같지 못하여 인가(人家)가 날로 적어지고 장사꾼이 드물게 이른다. 이것은 반드시 관리(官吏)의 주구가 날로 심해지고 그곳 백성들의 살길이 날로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 폐막을 제거하고 병폐를 없앨 수 있는 방책에 대해 각별히 문견 사목(聞見事目)을 갖추어 주달(奏達)하라"라고 했다.
강경과 광천은 임금이 직접 암행어사를 보내 살필 정도로 조선 후기 3대 시장의 하나로 수산물 집하장이며, 무역의 중심기지였던 것이다. 지금은 강경시장의 중심지라서 마을 이름이 된 중앙리로 바뀌었지만, 이곳은 서해의 염전에서 나는 소금을 사들여 창고에 쌓아놓았다 하여 마을 이름이 '염천리(鹽川里)'라 불렀으며, 하루 100여 척의 고깃배들이 드나들어 파시(波市)가 이루어졌다.
이렇듯 강경포구가 조선 후기 3대 시장의 하나로 수산물 집하장으로서의 본격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객주 중심 체제를 유지하여 전국 각지의 상인들로부터 돈을 모아 출어자금을 대어주고 잡은 고기를 판매하여 구전을 받아 상권을 확장해 나갔다.
객주들은 한사람이 수십 명씩 수산물 도매상인들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뱃사람들까지 일을 시켜 자연히 강경수산물시장은 포구 주인층인 객주(客主)와 여각(旅閣)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이 당시 강경에는 10여 척씩 부리는 객주들이 20여 명이나 있었다고 전해지며, 해마다 성어기인 봄과 가을철 동안 강경포구는 전국에서 가장 생기있는 장시가 열려 충남을 비롯하여 충북, 전북, 경기 등지의 이름 있는 상인들은 생선, 건어물 등을 사기 위해 강경으로 몰려들어 최대 거주인구가 3만 명이었고 상인들의 유동인구까지 합치면 10만 인구로 여각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무렵의 어업은 조그만 범선을 이용한 근해조업이어서 서해의 고군산 열도가 최대어장이었고 여기서 잡은 어류들이 금강을 타고 강경으로 들어왔는데 조기와 갈치는 전국의 수요가 전부 이곳으로 입하되었고, 민어, 홍어, 게, 전갱이, 새우젓 등 서해에서 잡은 어류들은 모두 강경을 통해서 소비지로 팔려나갔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경제수탈 전진기지로 삼으면서 강경은 최고의 번성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강경은 일본의 패망과 함께 쇠퇴했다. 해방과 함께 5년 만에 찾아온 한국전쟁으로 강경 시내가 폐허가 된 이후, 생계를 위해 과거 수산물을 저장하고 숙성시켰던 전통을 바탕으로 젓갈산업을 일으켰고, 강경을 지탱해주는 중심산업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강경 |
강경은 굳이 재래시장을 가지 않아도 강경읍내가 온통 젓갈시장이다. 예전에는 도라무통(드럼통(drum桶)을 속되게 이르는 말)에 비닐을 넣고 새우젓을 보관했는데, 요즘은 위생적인 스덴통(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든 통)에 각종 젓갈을 담아 놓았다.
새우젓은 새우의 크기와 잡는 시기에 따라 여러 종류로 구분되며 이름도 달라진다. 연초에 잡은 새우로 담근 새우젓을 '풋젓'이라 하고, 서해안에서는 이 '풋젓'을 '데뜨기'나 '돗떼기'로도 불린다. 2~3월 서해의 깊은 바다에서 잡은 작은 새우로 담그는 젓갈을 '곤쟁이젓'이라 하고, 5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갈을 '오젓' 6월 산란기 새우로 담근 젓갈을 '육젓'이라 하는데, 이 '육젓'은 상급 품으로 높이 쳐진다.
7월에 잡은 새우로 담은 젓갈을 '차젓'이라 하고, 충남 서천의 특산물로 초가을에 소량으로 잡히는 새우로 만든 젓갈이 '추젓'이다. 주로 김장시즌에 많이 보이기도 하고 이용하는 젓갈이 바로 '추젓'이다.
11월에 잡히는 새우로 담그는 젓갈로 잡어가 섞여 들어가는 '동젓'이 있고, 2월에 잡히는 새우로 담는 젓갈을 '동백하'라고 하는데, 어채가 희고 깨끗하다.
주로 전남지방에서 많이 담는 새우가 아닌 생이로 담는 젓갈을 '토하젓'이라고 한다.
젓갈을 파는 상점에 가니 색깔들이 모두 다르다. 육젓이 붉고 오젓은 핑크색, 추젓은 희다. 새우젓 외에 황석어젓, 밴댕이젓 등 다양한 젓갈이 보인다. 젓갈 시장을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점심때를 놓쳐 벌써 오후 2시가 넘었다.
강경 법원 옆 만나식당 |
이 집은 젓갈도 팔면서 식당을 하는 집인데,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듯 간판이 색이 바래 유심히 보기 전에는 그냥 지나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식당에 들어서니 여주인이 "몇 분인가요?"한다. 요즘 가끔 겪는 일이지만 맛집에서 혼밥하기란 쉽지가 않다.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혼자인데요." "1인분은 안 되고 2인분부터 가능한데요." 난감하지만 취재는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2인분 값 계산 할 테니 주세요." 밥 두 그릇과 다양한 젓갈을 비롯해 12가지 반찬이 나왔다. 나는 밥 한 그릇을 제쳐 두고 식사를 시작했다.
주인은 2인은 12가지 다양한 젓갈과 반찬이 나오지만 3인이면 16가지, 4인 이상이면 20가지가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20가지의 젓갈과 반찬의 맛을 보려면 4인 이상 가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1인이 부담하는 가격은 같은데, 동반의 혜택이 이렇게 클 줄이야 강경 젓갈 밥집의 상술이 고단수다.
만나식당의 젓갈 정식 |
젓갈밥상에 상추가 있다. 필자는 상추에 밥과 젓갈을 올려 두어 쌈을 하고, 젓갈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하고자 청어알젓, 명란젓, 가리비젓 등의 순서대로 하나하나 맛을 봤다.
젓갈 나름의 미세한 맛의 차이 그 차이가 조상의 슬기로움이 묻어 난 천년의 맛이 입안에서 맴돈다고 생각하니 혼자 2인상을 받으니 부담은 되지만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상차림을 보고 젓갈의 고장에서 있는 젓갈을 그대로 담아내는 편리함이 조금은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집 나름의 맛 즉 그 솜씨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냉이, 쑥, 시래기가 들어간 장국은 부드럽고 감칠맛이 있어 좋았다. 밥상은 반찬의 가짓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밥과 반찬, 반찬과 반찬 간에 얼마만큼 조화로운 맛을 낼 수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김영복/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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