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진로집의 두부두루치기 |
두부가 최초로 등장한 문헌은 『목은집(牧隱集)』이다. 이 『목은집(牧隱集)』은 고려는 물론 원나라의 과거에서 장원을 한 고려말 성리학자이자 문신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문집이다. 이 『목은집(牧隱集)』에 '대사(大舍)가 두부를 구해 와서 먹여 주기에'라는 시(詩) 등 두부에 대한 시가 다수 나온다.
시 한편을 소개하면 이렇다. 오랫동안 맛없는 채소국만 먹다 보니/ 두부가 마치도 금방 썰어낸 비계 같군/성긴 이로 먹기에는 두부가 그저 그만/늙은 몸을 참으로 보양할 수 있겠도다/오월의 객은 농어와 순채를 생각하고/오랑캐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양락인데/이 땅에선 이것을 귀하게 여기나니/황천이 생민을 잘 기른다 하리로다"
여기서 우리가 두부를 먹을 때 胡人(만주 사람)은 양락(羊酪) 즉 치즈를 먹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보면 세종 10년(1428년) 공조 판서 성달생(成達生)이 명나라에 있으면서 보고하기를 "사신 백언(白彦)이 찬녀(饌女)를 시켜 술·과일·두부(豆腐)를 만들어 올리니, 황제가 매우 가상(嘉尙)히 여겨 곧 백언을 어용감 소감(御用監小監)으로 제수(除授)하고 관대(冠帶)를 내려 주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명나라의 사신 백언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다가 명나라로 돌아갔는데, 그때 딸려간 찬녀가 정통 조선식 두부를 만들어서 황제에게 올렸더니 황제가 두부가 맛있다면서 벼슬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후 명나라 황제가 세종대왕에게 칙서를 보냈다.
세종 16년(1434년) 천추사(千秋使) 박신생(朴信生)이 칙서 세 통을 싸서 받들고 경사에서 돌아왔다. 명나라 황제는 "왕이 먼젓번에 보내온 반찬과 음식을 만드는 부녀자들이 모두 음식을 조화(調和)하는 것이 정하고 아름답고, 제조하는 것이 빠르고 민첩하고, 두부(頭腐)를 만드는 것이 더욱 정묘하다. 다음번에 보내온 사람은 잘하기는 하나 전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못하니, 칙서가 이르거든 왕이 다시 공교하고 영리한 여자 10여 인을 뽑아서, 반찬·음식·두부 등류를 만드는 것을 익히게 해 모두 다 정하고 숙달하기를 전번에 보낸 사람들과 같게 하였다가, 뒤에 중관을 보내어 국 중에 이르거든 경사(京師)로 딸려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렇듯 두부는 명나라 황제가 칭찬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이어 온 우리의 고유한 음식 중에 하나다. 두부 하니 어렸을 적 소리로 일거리를 구하거나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생각이 떠오른다. 징을 울리며 다녔던 굴뚝청소부, 일거리를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밤에 막대기를 두들기며 다니는 야경꾼이 있었고, 낮에는 엿장수의 가위소리 아침에는 종을 손에 들고 다니며 두부를 파는 두부장수가 있었다. 한편 "생선명태나 갈치나 꽁치 고등어~~~!"라며 목청껏 소리를 질러야 되는 생선장수와 찹쌀떡이나 메밀묵 장수가 있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콩나물은 대부분 집에서 길러 먹지만 두부는 집에서 하기가 쉽지 않았고, 생선 역시 보관이 어려웠다. 조선 후기 김진수(金進洙 1797~1865)의 『벽로별집(碧蘆別集)』 농가(農家) 제3수 두부(豆腐)라는 시가 나온다. "처마 끝의 가지에 대추 꽃 처음 피면/허리에 낫을 차고 보리를 벨 때라네./흰 소매에 푸른 치마 입은 아내 들밥 없으니/자장작불 손수 피워 두부를 삶으리라"
이렇듯 두부는 항시 해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들에서 일할 때나 관혼상제 등 가정의례가 있는 큰일에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당시 아침마다 행상을 하는 생선장수와 두부장수는 돈이 되는 장사였다.
특히 두부장수는 집에서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가마솥에 끓여 간수를 친 후 목판에 굳힌 두부목판을 지게에 지고 새벽마다 종을 흔들며 골목을 다니다 그릇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흰 천을 제치고 한 모씩 팔았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전쟁이 끝난 5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들의 삶에 묻어 있던 풍경이었다. 특히 보릿고개를 겨우 넘겨야 했던 이 시절 두부는 서민들의 훌륭한 단백질 보충 원이었으며, 역사가 오래된 우리의 고유음식이다. 1950년 여름 대전은 전쟁 발발 후 임시수도의 역할을 감당하였고, 전투와 폭격으로 대전역을 비롯한 대전 시내는 폐허가 되었다. 이러한 아픔을 겪으며 종전 후 대전시내는 판자집이 생기고, 교통 요지인 대전역과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많은 장사꾼과 노무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로 인해 노점상이나 포장마차와 같은 작은 식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전 진로집 입구 |
대전의 두부 두루치기 식당인 진로집의 남 씨는 '두부를 맛있게 매쳐라, 때려라, 매때려라, 두루쳐 내와봐라'하는 말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럴까? 우선 '두루치기'에 대해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1966년에 편찬된 [국어대사전]에 두루치기는 조개 낙지 같은 것을 살짝 데쳐서 양념을 한 음식으로 기록되었으며, 1994년에 편찬된 [새국어사전]에는 돼지고기, 조갯살 낙지 따위를 살짝 데쳐서 갖은 양념을 한 음식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살짝 데치다 양념을 했다는 것은 볶다가 양념을 넣어 끓이거나 조린다는 방식과는 달라 현재의 두루치기와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두루치기'는 '두루'와 '치다'의 명사형인 '치기'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두루는 '빠짐없이 골고루' 즉 '두루두루'라는 뜻이다. '치기'의 원형인 '치다'는 원래 "손이나 손에 든 물건으로 뭔가를 세게 부딪치게 하는 행위"를 이르는 동사인데 이로부터 파생하여 달리 '셈을 치다'에서처럼 "셈을 맞추다", "계산에 넣다"라는 의미로도 쓰이고, 또 "…한 셈 치다"에서처럼 "어떠한 상태라고 인정하거나 사실인 듯이 받아들이다"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말이다. 따라서 '두루 친다'는 '두루두루 맞추다', '두루두루 한 셈 치다'라는 의미로서 '포괄적', '종합적'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국어사전은 '두루치기'를 "한 가지 물건을 여기저기 두루 씀. 또는 그런 물건", "두루 미치거나 두루 해당함"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여기서 더 진화하여 "한 사람이 여러 방면에 능통함. 또는 그런 사람"이라는 뜻풀이도 하고 있다. 두루치기는 팔방미인이라는 뜻도 갖고 있는 것이다. 루치기'는 '두루두루'에서 파생된 말인데, '두루두루'의 유의어(類義語)는 '골고루'다.
두루치기와 돼지고기나 삼겹살로 하는 주물럭과 제육볶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두루치기는 고기에 재료와 양념을 넣고 볶다가 물을 약간 넣고 센 불에 끓인 음식을 말한다. 두루치기는 제육볶음보다 약간 물기가 있다. 여기서 '짜글이'는 양념한 돼지고기에 감자와 양파 등의 채소를 넣어 찌개보다는 물이 적지만, '두루치기'처럼 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찌개와 볶음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음식이다.
주물럭은 고기에 갖은 양념을 넣고 잘 주물러 숙성시켜 굽는 음식을 말하고, 제육볶음은 돼지고기에 갖은 양념을 넣어 볶다가 다시 부추, 양파 따위를 넣고 볶음 음식을 말한다. 세 가지 음식은 비슷하지만 조리방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라도 두루치기는 쇠고기와 내장을 기본 재료로 화려한 고명을 얹은 음식이다. 일부 달걀을 푸는 경우도 있다. 국물이 적은 편이라 짜글이나 제육볶음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어쨌든 진로집이 장사를 시작한 1969년 이전의 사전인 1966년에 편찬된 [국어대사전]에 이미'두루치기'라는 말이 나왔다. 이 말은 대전의 두부두루치기 이전에 두루치기라는 음식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진로집 내부 모습 |
필자는 매운맛에 약해 중간 매운맛을 시켰는데, 이조차도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매웠다. 두부를 모두 건져 먹고 남은 양념에 칼국수나 우동사리를 넣어 먹어도 좋다. 진로집에는 그냥 두부만 들어간 '두부 두루치기'와 오징어랑 두부가 같이 들어간 오징어 두부 두루치기 두 가지 메뉴가 있었다. 두부두루치기 따로 오징어두루치기 따로 파는 곳도 있다. 대전의 두부두루치기는 밥반찬이나 술안주로 담백하게 즐길 수 있는 대전만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라는 점에서 향토음식으로 발전하여 중앙로와 대전역 인근을 중심으로 충남도청이 대전에 소재하던 시절부터 두부두루치기는 구도심의 중장년층들이 사랑하는 음식으로 꼽힌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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