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섭 교수 |
비슷한 프로그램 중에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도 있다. 소위 '금쪽이'로 불리는 아이의 문제행동을 분석하여 합당한 처방을 내리는 방식이다. 부모가 누구길래 아이를 저렇게 키웠을까 싶다가도 막상 원인을 파악하고 적절한 훈육을 제시하는 대목에선 고개가 끄덕여진다. 결국, 두 프로그램의 핵심은 교육이다.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따라 개나 사람이나 달라진다는 얘기다.
요즘 초등학교 1학년으로부터 불거진 학생지도 문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소중한 목숨을 뒤로한 교사가 나오는가 하면, 만 명이 넘는 선생님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등 변화를 바라는 목소리도 거세다. 그동안 중학생을 '중2병'이라 하여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는 과정으로 수긍하고 넘어갔는데, 초등학교 1학년이 가장 큰 문제라니…. 이해하기도 믿기도 힘들다. 하긴 학부모의 예민한 반응으로 말미암아 포기한 유치원과 초등학교 인성교육을 중학교에선 사춘기로 눈감아주고 고등학교는 입시라는 이유로 내버려 두기 때문에 사회로 나가기 전 마지막 단계인 대학교가 인성교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과연 대학교에선 인성교육을 담당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대학생끼리 술자리에서 불거진 시비로 대학교에서 조사위원회가 꾸려진 일이 있었다. 민원을 제기한 사람은 한 학생의 학부모였다. 자녀가 술에 취해 분명치 않은 기억으로 추측성 피해를 호소하자 다른 학생의 부모도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맞선 것이다. 피해가 중대한 것이 아니어서 간단한 사과를 받기 위함이었지만 상대 학생은 잘못이 없는데 사과할 수 없다고 버티고…. 그러니 학교에서 판단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각자 변호사를 동원해 법적으로 시비를 가리겠다는 거였다. 결국, 두 부모를 따로 불러 진정시키는 선에서 정리됐다. 그 과정에서 바라본 흥미로운 사실은 서로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아니라 부모가 나서서 사건을 키우고 당사자들보다 더 격한 감정과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간혹 부하 직원의 부모가 직장 상사에게 연락해 자녀의 평가에 선처를 구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진다고 한다. 문제는 부모의 부탁이 성공하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성인으로 부정적인 낙인만 만들어 낸다. 대개 부모의 지나친 간섭과 보호를 받는 성인 자녀는 그가 속한 집단과 사회로부터 오히려 배척과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다. 자라는 동안 부모가 떠받들어주는 환경이 자녀를 세상에 군림하는 폭군으로 키울 수도 있다. 가끔 영화에 등장하는 안하무인에 버릇없는 청소년 캐릭터는 부잣집 도련님이거나 권력자의 자녀인 경우로 그려진다. 부모가 베푸는 아낌없는 풍요와 맹목적인 사랑이 오히려 자녀를 세상에서 어울려 살아가기 어려운 존재로 키운다는 역설이다.
어린 자녀는 부모의 선의를 악용하는 영악한 행동을 보일 때가 있다. 자신의 욕심과 편함을 우선하려는 본능이 부모를 조종하려 든다. 부모 눈에는 애가 어려서 그러려니 생각하겠지만, 이때가 훈육이 필요한 절대적 순간이라고 금쪽이 담당 오은영 박사는 강조한다. 선진사회일수록 부모가 자식을 훈육하는 모습이 엄한 편이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교육함으로써 자라나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중과 사랑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자녀에게 엄한 훈육이 가능한 사람은 부모다. 과거 권위적인 사회에선 학교와 군대가 체벌로 문제행동을 다스리기도 했지만 이미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시대가 됐다. 어릴 적부터 자녀의 못난 행동이 부모 얼굴에 먹칠한다고 수없이 들어왔다. 자녀가 곧 부모를 대변하기에 부모는 자식을 바른 모양으로 훈육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세상과 관계하는 모든 행동은 교육의 결과다. 사랑만이 유일한 자녀교육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교육이 훌륭한 것이다.
/송복섭 한밭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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