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구 한국화학연구원 전문연구위원 |
'죽은 정승이 산 개보다 못하다'라는 속담이 있다. 죽음에 대한 한국인의 부정적인 인식이 매우 강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무덤이나 공동묘지는 일반 사람들의 생활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과거 유교 풍습으로 죽은 조상들에 대한 예(禮)는 극진히 갖추면서도, 대체로 한국인들은 죽음을 소멸로 여겨왔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내세(來世)보다 현세(現世)를 중시하는 의식세계 속에 살아온 탓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은 유달리 생(生)에 대한 집착과 함께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수십 년 전만 해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을 손자와 손녀가 다 지켜보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삶을 가족이 보살피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죽음이 일상사에 포함되어 있었다. 더구나 백신과 항생제가 개발되기 이전에는 전염병으로 죽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는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사상이 유행할 정도였다. 요즘은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 하면서 많은 장례비를 들이고, 말기암 환자도 온갖 연명(延命) 치료를 받으며 혼수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비싼 의료비와 장례비의 부담은 남은 가족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과연 이런 임종과 장례문화, 나아가 죽음관은 올바른 것일까.
20세기 들어 유물론이 우세해지고 생명 연장을 위한 의료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함에 따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또한 바뀌었다. 한국인들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그러다 막상 죽음이 닥치면 죽은 사람이나 주변 사람이나 아무 준비가 없었으니 놀라고 당황한다. 죽음은 갑자기 닥쳐오는데, 한국인들은 평소에 준비를 잘 안 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부모나 배우자, 가족이 갑자기 그런 상태가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의지가 있기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도 바뀐다. 예컨대, 전생(前生)에 살인을 저질러 그 업(業)을 소멸하기 위해 이생에 태어났다고 해도 반드시 비극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가 철저히 회개하고 다른 선업(善業)을 많이 쌓았다면 이미 카르마는 소멸했을 수도 있다. 지금 내가 겪는 경험은 과거 내 행동의 결과이고, 지금 내 행동이 미래의 내 경험이 된다.
언제부턴가 죽음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사회에 깊이 자리잡게 되면서, 요즘에는 30~40여 년 전과는 정반대로 대부분 병원에서 객사(客死)한다. 그러나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집 밖에서 객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말기 질환으로 입원 중인 환자라도 임종이 임박하면 인공호흡 장치를 단 채 퇴원해, 집에 도착하는 즉시 장치를 떼고 순리대로 임종을 맞이하는 일이 흔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큰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맞게 된 배경에는 죽음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의 변화가 자리한다.
늙어갈수록 자연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좋다. 나 역시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 자연과 친밀해지면, 마음도 순화되고 멍에도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삶의 모퉁이를 돌아 죽음을 마주칠 때가 내일이 될지 십 년 후가 될지 모르는 채, 우리는 매일매일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을 꽉 막힌 벽으로 여길지, 아니면 열린 문으로 여길지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방식은 크게 달라진다. 이젠 우리 사회도 죽음을 회피하지 말고, 멍에와 죽음에 관한 논의를 활성화하면 어떨까. 이동구 한국화학연구원 전문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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