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야욕이 조선에도 알려져, 확인코자 선조가 사절단을 파견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선조 23(1590)년 3월 6일 "일본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이 출발하였다."
돌아와 황윤길은 도요토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으며 반드시 침범이 있을 것이라 하였고, 김성일은 도요토미는 두려워할 인물이 못 되며 전쟁은 없을 것이라 보고하였다. 두 사람 견해가 서로 상반된 것이 붕당 때문이라 보는 견해가 많다. 김성일과 같은 동인이었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사절단 보고 후 김성일이 궁궐을 빠져나오며 "제가 어찌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저는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민심이 흉흉해질까 봐 그렇게 말했습니다." 선의로 그랬다고 적고 있으나, 거짓이었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임진왜란 전에 유성룡 자신도 나라 운명이 풍전등화임을 알았다는 말이 된다. 이미 전쟁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으며, 일본 정세변화에 눈뜬 여러 사람이 십만 양병설 등 대비책을 진언하던 시기이다. 유성룡 본인이라도 적극 대비에 나섰어야 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황윤길이 신무기라 할 조총 두 자루 까지 가지고 왔으나,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집권 세력이 동인이었기 때문일까? 쉬운 길 선택이 인지상정일까? 후안무치한 선조도 한몫했음이 분명하다. 무방비로 7년 전쟁을 맞이한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에 한 치의 소홀함, 거짓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당리당략이 우선시 되면 안 된다. 싸우더라도 판단 기준은 나라의 흥망성쇠에 있어야 한다. 국가 대사에 어떠한 경우나 방편으로도 거짓이 옹호 또는 미화되어서도 안 된다. 떠오르는 두 가지 이야기를 덧붙인다.
중국 전국시대 이사(李斯, 기원전 284년 ~ 기원전 208년)라는 사람은 진나라를 도와 천하통일 하였다. 통일 후에도 많은 개혁 정책으로 진시황을 도왔다. 지나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같은 것을 진언하기도 한다. 권모술수를 일삼다가 요참형에 처해진다. 그 이사전을 읽고 당나라 시인 조업(曹?)이 시 한수 읊었다.
"이사전을 읽고 / 한 수레에 바퀴 세 개 단 것은 / 본래 빨리 달리려는 것인데 / 수레 몰이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것 / 출발 하자마자 뒤 집어 질 수밖에 없네 / 남이 모르는 것을 속이려 해도 잘 안 되는데 / 세상이 아는 것을 속이려 했으니 죽게 되었네 / 어렵도다, 한 사람 손으로 / 천하의 눈 가리기가 / 보지 못했는가, 석 자 높이 무덤에 / 흐렸다 맑았다 풀만 공연히 푸르른 것을"
후한서 양진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 중국 후한 때에 양진(楊震)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동래 태수가 되어 부임하는 중에 창읍현을 지나게 되었다. 예전 형주에 있을 때 천거하였던 왕밀(王密)이라는 사람이 그곳 현령으로 있었다. 은인에다 고관이 지나는데 어찌 모르세 할 수 있으랴, 밤이 되자 양진의 처소로 찾아와 황금 열 근을 전하려 하였다. 양진이 말하였다. "옛날의 나는 그대를 알았는데 그대는 옛날의 나를 모르니 어찌 된 일인가?" 왕밀은 날이 저문 밤이라 아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 양진이 말하였다,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며 내가 알고 그대가 아네.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가?(天知 地知 子知 我知 何謂無知)" 왕밀이 부끄러워하며 나갔다 한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사지(四知)이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거짓 역시 백일하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나 더, 양진은 학덕이 높고 성품이 공명정대했다. 청렴하여 사사로이 청탁받지 않았다. 자손은 푸성귀 먹고 걸어 다니게 하였으며, 산업보다 청백리(淸白吏)를 물려주려 하였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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