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숭숭한 마음을 추스르면서 뭔가 뜻깊은 일을 하고 싶던 터, 추석 명절을 맞아 참배를 대신 다녀오기로 했다. 미국에 사는 친구가 요즈음 하루가 멀다 않고 카톡을 보내오는데 아무래도 국내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해서 인 것 같아서였다. 대전에서 그곳까지는 대중교통편이 잘 되어있어서 그러잖아도 솔선해서 일 년에 한 두 번 참배를 다녀오는 편이다.
그날도 집 근처 꽃집에서 조화를 사 들고 가는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하더니 K 공원 입구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왔다. 큰비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슬부슬 비가 오니까 으스스한 것이 저 멀리 산등성이에 위치한 봉안당이 왠지 들어가서는 안 될 기괴한 성곽을 연상케 했다. 평일이어서 공원 내는 인적도 드문 편으로 을씨년스럽기조차 했다.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걸어서 봉안당 건물 앞에 다다르자 마침 다른 참배객도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그들이 반가웠다. 그들을 보자 비로소 사람이 있는 곳 어딘가 건물에 온 것 같아서 두려움이 없어진 것이다. 그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건물 안쪽 층계로 올라갔다. 봉안당 각 호실에는 유리장 안에 고인의 영정사진이 보였다.
나의 부모님은 대전 시내에서 가까운 대청호반 선산에 모셔져 있다, 지인들은 오며 가며 들러서 풀 뽑고 왔다며 인증샷을 보내주곤 하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울컥했었다. 실은 그 때문이다. 내가 자청해서 친구 부모님을 참배하는 건. 고인은 생전에도 명절 때 찾아가면 딸을 만난 듯 눈물을 글썽이며 반갑게 맞아주셨었다. 그날도 미소 짓고 계신 듯했다.
"어머니, 잘 계시지요."
고인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친구에게 보낼 사진을 찍으려고 준비해 간 조화를 가지런히 놓았다. 문득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이승과 저승에 각각 있다니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저 안에 있겠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 그곳의 묵중함에 눌렸다.
참배를 마치고 봉안당을 나오니까 비로소 인간이 사는 세상으로 나온 듯 몸이 가뿐했다. '아, 나는 살아있는 건가. 봉안당이 있는 산등성이 아래 자리한 K 공원의 아름다운 전경도 비로소 시야에 들어왔다. 봉안당을 찾아 올라갈 때 그 으스스한 느낌도 한결 덜했다.
그곳에서 나와서 대전행 시내버스를 탔는데 하필 승객은 달랑 나 혼자였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먹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언제라도 폭우가 내릴 기세였다. 그러나 버스는 날씨 따위는 아랑곳없이 질주했다. 인적이 드문 낯선 길을 마치 중력으로 이끌려 가듯이 내달렸다.
음울한 날씨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달리는 차 안에서 상상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가다가 어느 시점에서 공중 부양이 될 것만 같은 상상에 사로잡혔다. 만일 공중 부양 된다면 내 존재는 없어지는 걸까.
얼마쯤 왔을까. 차창 밖이 소란했다. 지하철역이 가까워졌다.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내 좌석 뒤를 돌아보았다. K 공원 앞에서 출발 때와 똑같이 승객은 달랑 나 혼자였다. 텅 빈 버스 안이 왠지 낯설었다. 평일 낮이어서 승객이 없는 것 같기는 했다.
나는 지하철로 환승했다. 지하철에도 승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몇 안 되는 승객들이 커플들인지 그날따라 젊은이들은 은밀하게, 드문드문 앉아계신 등산복 차림의 연세 드신 분들은 두 손을 꼭 잡고 각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웃음소리가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내 바로 앞 맞은편 젊은 커플은 아예 거의 밀착 수준이다. '에구머니나…' 다른 날 같으면 눈살을 찌푸리면서 뉘 댁 자식인지 예의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날은 젊음이 좋아 보였다.
참배하면서 식었던 내 체온이, 그들을 보면서 점점 뜨거워져서일까. 사랑한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이다. 숨을 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자리를 비켜주고 싶기도 했다. 때마침 지하철이 시청역에 도착했다. 그들에게 말 없는 응원의 눈짓을 보냈다.
"젊음을 맘껏 즐기세요."
민순혜/수필가
민순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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