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은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이고, 언어는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이다. 수도는 키이우이며, 면적은 60만 3,500㎢로 남한의 6배라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보면 마치 우리나라가 숱한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고 저항했던 지난날을 보는 듯하다.
스탈린의 1932-33년 집단농장 추진 과정에서의 인위적 기아 정책에 의해 우크라이나 농민 800만 명이 아사했다. 또한 전쟁, 기근 등으로 많은 국민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1939년 4.1천만 명의 인구가 1945년에는 2.7천만 명으로 대폭 감소하였다고 한다.
1934년에 키이우(키예프)는 소련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소련 당시 모스크바, 레닌 그라드 다음의 제3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대전을 계기로 소련은 폴란드에 귀속된 西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베사라비아, 北부코비나를 병합한다.
1941∼44년에는 우크라이나 전역이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1945년에야 비로소 유엔 창설 회원국이 되었다. 1954년에 소련 정부는 페레야슬라브 협정 300주년을 기념하여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이양했다.
이후 1980년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소련 중앙정부의 장악력이 약화됨에 따라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독립 선언법을 채택하였다.
이어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에 의해 독립을 최종 확정한다.
1991년 12월 5일 레오니드 크라프축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2019년 3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젤렌스키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현재에 이른다. 우크라이나는 땅이 넓고 비옥해 유라시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꼽힌다.
하지만 동시에 '강대국들의 화약고'라는 숙명을 안고 있다. 유럽 열강이 동방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였고, 러시아엔 흑해와 지중해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우크라이나는 현재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
6.25전쟁의 참화를 경험한 바 있는 우리는 그래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아픔과 상처를 모른 척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국제청소년연합 대전센터에서는 9월 24일 낮 12시 30분부터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한 추석맞이 희망 바자회 2> 행사를 가졌다. 취재를 위해 이곳에 갔다가 구름처럼 몰려드는 인파에 깜짝 놀랐다.
이는 우리 한국인들의 아름다운 품성을 새삼 발견한 때문이었다. 국가와 이웃의 어려움을 간과하지 않는 국민성은 이미 증명이 된 지 오래다. IMF 때 금 모으기 운동 적극참여, 태안 바다 기름 유출 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달려가 기름을 걷어낸 봉사정신은 진작 세계인들을 감동시킨 바 있다.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늙은이들이지만, 싸우다 죽어야 하는 자들은 젊은이들이다."라는 말이 있다. 전쟁의 위험을 가장 알짬(여럿 가운데에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표현한 압권의 명언이다.
그런데 이 말이 현재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국가는 단연 우크라이나일 것이다. 우리는 장장 엿새 동안의 추석연휴를 즐기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여전히 비극과 눈물만 교차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하루라도 빨리 러시아군이 철군하길, 그래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잃었던 자유와 평화, 경제적 재도약까지 되찾기를 진심으로 축원했다.
홍경석/ 작가, 장편소설 <평행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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