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드레나루에서 본 규암과 백마강 |
부여에서 1955년 시작돼 올해 69회를 맞은 대백제전이 공주. 부여 일원에서 9월 23일부터 10월 9일까지 열리고 있다. 대백제전은 공주 금학동이 고향인 필자의 이웃에 사시던 강순태 군수님이 부여 군수 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1955년 4월 부여군민이 부소산성에 제단을 설치하고 백제의 성충, 흥수, 계백 등 삼충신(三忠臣)에게 올리는 제향과 백마강 낙화암(落花巖)에 몸을 던진 삼천 궁녀의 넋을 위로하는 수륙재가 거행되면서 오늘의 대백제전이 시작되었다. 백마강 구드레나루터에는 대백제전을 준비하는 돛단배들이 떠 있다.
백마강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한 이후 비단강이라 불리는 금강 서쪽으로 흘러서 공주에 이르러 유구천(維鳩川)과 합류한 뒤 남류해 부여군으로 들어와 백마강이라 불리게 된다. 부여 부근에서 다시 은산천(恩山川)과 금천(金川), 강경 부근에서 논산천(論山川)과 합류한 이 강은 충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며 유로연장 397.79㎞를 서해로 들어간다.
삼충신 위패를 모시러 망월산 의열사지 짚차를 타고 가는 강순태 부여군수 |
이곳에는 백제 왕이 오갈 때 스스로를 따뜻하게 데워 쉬어가게 했다는 '자온대(自溫臺)'가 있는데, 강 절벽에 송시열의 글씨로 '자온대(自溫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자온대(自溫臺)'위에는 조선 광해군 때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낸 수북정(水北亭) 김흥국(金興國1557-1623)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할 때 건립한 정자(亭子)가 있는데, 수북정(水北亭)은 김흥국의 호를 따 지은 이름이다. 자온대(自溫臺) 바로 밑에는 나룻배를 운행하였고, 그 하류에는 강경을 왕래하는 돌배(수백 톤급의 동력선)과 상선이 사용하는 규암나루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신작로가 뚫리면서 규암나루터에서는 버스와 차량을 실어 나르는 넓적 배 즉 바지선이 운행되었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나무배 수십 척을 연결한 배다리를 놓아서 평소에는 사람과 우마가 통행을 했으며, 홍수로 유실된 후에는 나무다리 및 철선을 연결한 철배다리를 놓아 도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버스를 실어나르는 규암나루터의 바지선 |
그러다 보니 80~90년 대까지만 해도 규암에는 민물매운탕을 비롯한 음식점들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규암에는 규암나루터 인근에서 민물고기를 잡는 어부와 음식점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부여의 맛 하면 종어회와 우어회가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부여에서 유명했던 종어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글을 써 놓고 종어 사진을 구하려 충남내수면연구소 등을 방문했지만 아직 구하지 못했다. 종어는 멸종된 어류로 부여군은 물론 충청남도에서 관심을 가지고 양식 등을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 대중음식점에 보급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종어는 몸길이가 보통 20cm에서 50cm 정도지만 최대 크기가 90cm 이상 자란다고 한다.
이것에 재미있는 자료가 있다. 1530년(중종 25)에 왕명으로 편찬한 관찬(官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부여현(扶餘縣) 고적조(古蹟條)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바위에서 용을 낚았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된 뒤, 어느 날 대왕포(大王浦) 하류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닥쳐 규암진(窺巖津)에서 낙화암까지 늘어서 있던 수백 척의 당나라 병선이 순식간에 뒤집혀 침몰하고 말았다. 소정방이 괴변이 일어난 까닭을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이것은 백제를 지켜온 강룡(江龍)이 화를 낸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소정방이 다시 강룡을 잡을 방법을 물으니 일관은 "용이 좋아하는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낚는 것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강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서 쇠로 만든 낚시에 굵은 철사를 낚싯줄로 하여 백마 한 마리를 미끼로 달아서 던져 놓았다. 그러자 용이 백마를 삼켜서 소정방에게 잡히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은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고 하는 이 바위를 조룡대(釣龍臺), 용을 낚을 때 백마를 미끼로 썼다고 하여 이 일대의 강을 백마강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큰 물고기'를 한자로 '어룡(魚龍)'이라고 한다. 소정방이 어룡을 낚은 것이 와전되어 용을 낚았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빠가사리 |
우어는 청어목 멸치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길이가 30~40센치 정도 된다. 성질이 얼마나 급한지 잡히자마자 죽어버린다. 1400여 년 전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이 평소에 우어를 즐겨 먹었다. 백제가 함락당한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우어를 잡아 오라 명령했다. 백제의 왕들이 먹은 물고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많던 우어가 잡히지 않았다. 연고를 알아보았다. 한강이나 금강의 우어들이 적장의 먹거리가 될 수 없다고 의논한 후, 뱃전에 머리를 부딪쳐 모두 죽어버렸다고 한다. 옛 임금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우어가 백제지역에서 모두 달아나버렸다고도 했다. 이 때문에 의리 있는 물고기라는 뜻으로 우어는 의어(義魚)라 부르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우어는 왕이 살던 곳을 그리워한다는 전설도 생기게 됐다. 그래서 그런가 봄이면 한강 행주나루에 위어소(葦魚所)를 설치하고 우어를 잡아 왕의 수라상에 올렸다고 한다.
우어는 이 외에도 우여(강경), 웅에(의주), 차나리(해주), 우어(부여), 도어, 제어, 열어, 멸어, 망어 등의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보통 우리말로는 '웅어'라 하고 한자로는 위어(葦魚)라고 한다. 새끼는 '모롱이'라고 한다. 숭어의 새끼를 '모갱이'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국어사전에서는 웅어의 옛말을 '난셰끼노리'라고 한다. 한자말 웅어(熊魚)는 드렁허릿과의 민물고기를 뜻하는 이름이기 때문에, 위어(葦魚)인 웅어와 구별된다.
백마강 식당 |
특히 종어는 최 대표도 딱 두 번 구경하고 맛을 봤다고 하는데, 마치 상어처럼 생겨 크기도 크기지만 그 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우어는 3월에서 5월까지만 맛을 볼 수 있는 어종이다. 그런데 백마강식당에 '햇 우어회 개시'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섞어탕 |
특히 이 집의 민물고기들은 백마강에서 어부들이 직접 잡아 공급하는 자연산이라 '섞어탕'에 들어간 메기와 빠가사리가 탱탱한 것이 식감이 찰지고 부드럽다. 주메뉴의 맛도 좋지만 여주인의 깔끔한 외모만큼이나 밑반찬들도 꽤나 정갈하다.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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