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대하는 그림도 어느 날 문득 다가올 때가 있다. 오늘 김홍도 그림 <서당>의 훈장 모습이 그러하다. 엄하면서 사랑으로 가득 찬 참 스승의 마음이 절묘하게 표현되어있다. 우는 아이가 팔자 눈썹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훈도하는 훈장 역시 팔자눈썹이다. 안쓰럽기 때문이리라. 만면에 미소도 가득, 가르침과 사랑이 넘실댄다. 사제지간의 풋풋한 정이 느껴진다.
그림 전체가 푸짐한 두레밥상 같이 정겹다. 우측에 치우쳐있지만 훈장은 삼각형 모양으로 그려 안정감이 있다. 원형구도도 한 몫 했겠지만, 위압감이나 엄격함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서안 앞에 돌아앉은 아이가 왼손으론 눈물 훔치고, 오른손으로 대님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책을 가지고 나간 것으로 보아, 강경의 하나인 읽고 설명하기 시간인 것 같다. 학동 대부분 키득거리니 잘못이라기보다 뭔가 실수가 있었지 않나 싶다. 나물하고 있다면 누구라도 웃음이 나올 리 없다. 때문에 해석이 분분하다. 맞기 전 모습이란 주장도 있다. 실수하여 지레 겁먹고 눈물부터 흘린다는 것이다. 바짓가랑이 걷어 올리고 회초리로 종아리 맞은 다음, 다시 내리고 훌쩍이며 대님을 고쳐 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체벌을 멀리하는 요즈음 분위기로 해석, 과제 이행이 어려워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고 보기도 한다. 서안 곁에 놓인 가느다란 회초리는 그저 훈육용이거나 지시봉이란 것이다.
양편으로 갈라 앉아 키득거리는 아이 모두 무척 자연스럽다. 표정 또한 제각각이다. 웃는다고 같은 웃음이 아니다. 위쪽 셋은 다음 차례 일까? 책 펼치고 뒤적이며 살피고 있다. 제각각 웃음 참는 모습이 이채롭다. 학동 모두 댕기머리인데 한 아이만 갓을 쓰고 있다. 결혼한 친구인 것이다. 응원이라도 하는 것일까? 여유 있게 바라보며 뭐라 중얼거린다. 그 다음 앞쪽에 앉은 아이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자신감이 넘친다. 세 번째 아이는 '내 그럴 줄 알았다'하는 표정이다. 네 번째 아이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친구를 바라본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인물 위주로 예리한 순간포착, 익살스럽고 재치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당시의 사물인식은 평행 원근법에 의존한다. 이 그림에서는 지나쳐서 앞으로 올수록 인물 크기가 작아진다. 물론, 그림에서 주제나 특정 대상이 강조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훈도하는 사제지간의 모습이 주였던 것이다.
서당은 필요하면 누구나 설립, 유지, 경영할 수 있는 초등교육기관이다. 설립인가가 없었으므로 존폐가 자유로웠다.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교육학과 전공과목을 공부하고 준비한 다음 훈장이 되었던 것도 아니다. 학문과 도덕, 성품과 인격, 경륜 높은 사람이 천거되었다. 암암리 스승으로 모시거나 천거되었지 탓하거나 시비 걸지 않았다.
교육은 이상적인 인간상 구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인도하고 돕는 것이다.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함이다. 가르침으로 과정을 줄이는 것이다. 저마다 처음부터 시작하여 스스로 체험에 의존해 터득한다면 인류 지성과 문화의 발전은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도덕, 사회, 물리, 인지, 정서, 창의 등 다양한 영역을 어떠한 방법으로 발전시키고 숙지시키느냐가 관건이 된다.
그런 과정에 강제되는 경우도 있다. 강제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어서, 꾸중이나 체벌도 포함된다. 체벌이 나쁘기만 하다면, 오늘날 인류는 악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존속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상적인 교육 방법 속에는 바람직한 가정교육이 전제되어있다. 실은 어떤가? 천차만별이다. 누구나 알아서 원만하게 적응할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다.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 선악이 모두 내 스승이다. 어떤 것이고 몸가짐의 거울이 된다는 의미다. 논어 술이편에도 나오는 말이다. "여러 사람이 길을 같이 가면 내 스승이 있다. 좋은 점은 가려서 좇고, 좋지 않은 점은 고쳐야 한다.(三人行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좇아서 배우고, 고쳐서 배우라고도 해석한다. 이 말에는 옳고 그름의 분별력이 전제된다. 분별력은 가정과 사회교육에서 길러진다.
교육이 교사만의 책임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러나 학교교육 현장은 교사의 영역이요 책임이다. 지나치고 무질서한 간섭과 관여로 교육현장이 파괴되어서야 되겠는가? 소통과 협력의 장이 깨져서도 바람직한 교육을 기대할 수 없다. 조화와 균형이 있어야 한다. 교사의 연이은 안타까운 불행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에 국회에서 교권회복 법안을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교사에 대한 존중 없이 바람직한 교육을 기대하기 어렵다. 만시지탄이나, 최선의 법안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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