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석 건양대 국방경찰학부 교수 |
117년 전 미국 덴버 대학을 갓 졸업하고 결혼한 23살의 월리암스 선교사 부부는 일제에 빼앗긴 조선의 가난한 공주 땅에 와서 선교와 교육으로 한국인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우며 모든 것을 희생하셨다. 공주 영명학교를 짓고, 초대 교장으로 수많은 독립열사, 헌신하는 교육자와 신앙인을 양성 하였다. 선진 문명을 배우며 조국 독립을 염원하던 영명학교는 유관순 열사와 오빠이자 독립지사였던 유우석(애국장) 대한민국 내무장관을 지냈던 조병옥 등 애국지사를 배출하였다. 처음 2년의 임기를 채우고 안락과 행복이 보장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핍박받던 이 땅을 누비며 한 줄기 빛과 소금의 사역을 다하였다. 가족으로 3남 2녀 중 사랑하는 딸들과 막내 아들을 열악한 의료시설로 모두 풍토병으로 잃고 아이들이 뛰어놀던 공주 영명동산에 유해를 묻는 아픔을 함께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파견 되어 헌신한 선교사는 광복 때까지 1500여명, 해방후에도 3000여명이라고 한다. 특히 공주 제민천 하구에 위치한 일명 황새바위에는 1863년 365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아픈 역사처럼 위정자의 탄압과 온갖 위험에도 선교사들은 교육과 신앙을 전파하였다. 올해 광복 78주년을 기념하며 월리암스 선교사에 건국 포장을 수여한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보훈과 추모는 국가의 의무 아닌가. 월리암 선교사는 이 땅을 사랑하여 어려서 죽은 두 딸과 함께 공주 영명 동산에 묻히기를 희망하여 일부 유해가 현재 묘역으로 조성 되었다.
우리암의 맏아들 우광복은 독립을 염원한 '광복' 이름처럼 미군정 초대장관 하지 중장의 특별 보좌관으로 통역과 정책 제안으로 이승만 주도의
자유 민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크게 기여 하였다. 당시 혼란했던 해방 정국에 우리암, 우광복 부자는 40여년의 한국생활로 체득한 한반도 문제와 좌우 이념 대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능숙한 통역과 논리로 한반도 정세에 무지했던 하지 미군·정에 자유 대한의 정부 수립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구한말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의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노고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선교사들은 한반도 곳곳에서 교육과 계몽, 병원과 학교를 만들고 이 땅의 근대화와 광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암, 우광복 선교사 부자는 부귀와 편안한 삶을 버리고 나라없이 비참했던 이 땅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기독교적 사명으로 헌신하신 분들이다. 그저 한국 사람이 측은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며 아무런 댓가없이 질병과 풍토병으로 가족을 잃고 포악한 일제의 위협속에서도 이땅에 함께 하셨다. 고통받던 이 땅에 조국 광복의 희망을 심고 가꾸었으니 그 어떤 독립운동보다도 값진 것이 아닌가? 이제 선진 강국 대한민국도 국제 사회에서 책임있는 G10 국가로서 인류 보편의 행복과 인권, 자유와 평화에 도움주는 국가로 전 세계에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전쟁과 폐허속에서 피흘린 UN군과 미국 등 세계 각국의 지원과 원조가 오늘의 대한민국의 초석이 아닌가? 도움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도움 주는 나라로 한국의 위상에 맞는 국제 사회의 책무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 땅의 미래 젊은이들에게서 전 세계인을 향한 보편적 양심과 인권, 인간의 존엄과 경제적 번영에 함께하는 힘찬 발걸음을 보고 싶다. 심은석 건양대 국방경찰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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