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올해 초, 외국여행을 계획하던 중 그동안 잊고 있던 영어 회화가 절실했다. 영어학원 등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망설이는데 문득 전에도 가본 적이 있는 영어반(English Class) 생각이 났다. 교회 내에 있지만 비신자여도 수강이 가능했다. 나는 원어민과 대화할 수 있는 곳을 원했다.
전화로 문의하니 마침 영어반이 있다. 매 토요일 오후 1시간 정도 공부하는데, 그 주는 음력설 연휴로 여 선교사 두 명 모두 시간이 있다며 언제든 와서 영어공부를 하자고 했다. 개인 교습인 셈이다. 여 선교사는 여동생과 통화하는 것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떡국 등 한식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럼요, 한식 굉장히 맛있어요!"
나는 지인들이 선물로 준 사과, 배, 떡국, 김, 라면, 냉동만두 등 쇼핑백에 가득 갖고 갔다. 선교사들은 교회 내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했다. 우리 셋은 떡라면을 끓여 먹고, 각자의 고향을 떠올리며 풋풋한 시간을 가졌다. 그녀들도 음력설 연휴로 나는 3일 연속으로 찾아가서 대화를 나눴다. 오랜만에 영어 회화를 해선지 더듬대던 것도 차츰 말이 잘 나왔다. 그들이 첫날, 영어회화 공부 외에도 종교에 관해 말해도 되느냐고 묻기에 아직은 아니라고, 영어를 좀 더 잘하면 듣는다고 했더니 종교에 대한 말은 없었다.
하지만 연휴가 끝나고는 바빠서 자주 못 가고 3주에 한 번 토요일 영어반만 갔다. 토요일 영어회화반은 남녀 선교사 4명이 진행하는데 기분전환이 될 정도로 즐거웠다. 오래전 미국 내 학교 부설에서 2달 정도 강습받을 때 생각도 나고, 그래선지 토요일이 더욱 기다려졌다. 그런데 하필 그때마다 일이 생겨서 매번 못 가는 사이 그 선교사들이 이동이 생겨서 서로 못 만나고 말았다. 이튿날 만나기로 한 F는 그때 4명의 선교사 중 한 명이다.
F와는 이튿날, 교회에서 가까운 맥도날드에서 만났다. "A farewell Party!" 오늘은 내가 사겠다고 말하고 문 앞에 놓인 키오스크(kiosk)를 가리키며 각자 주문하라고 했다. 나는 키오스크에 익숙하지 않아서 내 것만 주문한 후 결제할 카드를 F에게 맡기고 자리로 가서 기다렸다. 그들은 결제를 마친 후 종류가 각기 다른 음료와 버거를 3인분 쟁반에 담아 갖고 왔다. 영어권이라도 대화가 잘 안될 수도 있는데 F는 무리 없이 대화가 잘 이어졌다. 그러니 영어회화를 연습하기에는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못 만나게 되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기회가 되어 다시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헤어졌다.
그날 저녁, 각자 먹은 메뉴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영수증을 꺼냈다. 그들이 갖고 온 버거가 맛있게 보여서였다. 그런데 영수증에는 두 개뿐이다. 음료는 3개 맞는데 버거는 두 개뿐이다. 분명 3명이 한 개씩 먹었는데 계산서에는 달랑 두 개만 있었다. 혹시 뒷장에 찍힌 건 아닌가 해서 몇 번이나 뒤집어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버거값은 없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F가 본인 것을 따로 계산한 것이다. 내가 3명 값을 계산하니까,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던 지 F는 본인 것을 본인이 계산한 것이다. 뒤에 서서 주문하지 않던 것이 생각났다.
문화의 차이를 실감했다. 단체톡에 있는 F에게 말했다. "A farewell Party"여서 사주고 싶었는데 왜 계산했느냐고 섭섭하다고. 그러나 F는 굉장히 즐거웠다며, 되레 고맙다고 했다.
그 주 토요일 영어반에 갔다. F는 없지만 그들의 문화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어서였다. 그날 같이 왔던 선교사에게 "너희는 더치페이(Dutch Pay)가 일상화 되어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면 그렇지, 사 준다는데 싫다는 사람은 없지.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그 선교사가 말했다. "'더치페이'라는 영어단어는 없어요"라고. 식사 후 그냥 각자 낸다고 했다. 한국에 오니까 그렇게 말해서 의아했다고 덧붙였다. 그 외에도 파이팅, 스킨십 등 영어는 없는 단어라고…….
말은 몇 사람 건너다보면 말뜻이 변색하기는 쉬운 것 같다. 나는 요즘은 특히 국어사전을 많이 보는 편이다. 문법도 많이 달라지고, 표기도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것이 많아서 일일이 사전을 찾곤 한다.
외국은 언어는 물론이고 정서가 달라서 더욱 조심하게 된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 중에 미국에 사는 친구 집에 갔을 때다. 친구가 매일 아침 출근할 때 같이 빵집에 가서 금방 구운 모닝 빵과 슈크림 등을 사갖고, 되돌아서 나를 친구 집에 내려주고 친구는 출근했다.
하루는 빵을 사려고 줄을 서 있는데 덩치 큰 흑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섬뜩한 생각이 들어서 슬며시 친구 팔을 끼었는데 순간 친구가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얘, 팔 빼!" 나는 팔을 뺐다. 그러나 뭔지 모르게 뜨악했다. 그날 저녁 친구는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미국은 동성끼리 팔짱을 끼면 동성연애하는 줄 아니까 팔 빼라고 했어.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내가 태어난 곳, 언어도 자유롭고 어디를 가든 낯설지 않은 내 나라가 가장 좋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나는 또 어딘가를 가기 위해 오늘도 준비를 하는 것은 왜일까. 산다는 것 자체가 이별을 준비하는 것은 아닐까, 문득 생각해 본다.
민순혜/수필가
민순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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