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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
평소 읽고 싶었지만 미루어 놓았던 책을 꺼내 읽다가 한 문장에 눈길이 멎었다. "플라타너스와, 꽃이 만발한 분수와, 그 언저리의 돌로 만든 긴 의자들, 저녁에 지팡이에 기대고 앉아 조용히 얘기를 나누는 노인들의 모습이 오랜 세월에 걸쳐, 수백 년에 걸쳐 거듭거듭 되풀이 된다. 주변의 대기까지도 시간처럼 예스러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탈리아 여행의 느낌을 적은 한 대목이다. 이 문장이 유독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아마도 평소 혼자 생각해보는 행복한 세상에 대한 내 나름의 이미지나 소망을 건드렸기 때문인 듯했다. 특히 '저녁에 지팡이에 기대고 앉아 조용히 얘기를 나누는 노인들의 모습이 오랜 세월에 걸쳐, 수백 년에 걸쳐 거듭거듭 되풀이 된다.'는 대목은 그 구체적인 모습까지도 머리 속에 그려지는 듯하고, 내가 그 노인 중의 한 사람이 되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앉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겹쳐지기도 했다. 사실 내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소소한 일상이 펼쳐지는 나른하고 편안한 노인들의 평화로운 모습보다는 그런 평범하고 특별할 것도 없는 매일 매일의 일상이 '오랜 세월에 걸쳐, 수백 년에 걸쳐 거듭거듭 되풀이' 된다는 대목이었다. 하찮아 보이는 일상의 평범함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것도 수백 년에 걸쳐 되풀이 되는 일이 가능할까? 그런 세상이 있을까 하는 부러운 생각이 이어졌다.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어느 마을에서 빵을 구워 파는 빵집 주인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굽던 빵을 똑같은 화덕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평생 굽고 있고, 마을 사람들도 그 빵을 매일 매일 평생 먹고, 그 아들이, 손자가 같은 빵집에서 같은 빵을 평생 구우며 사는 그런 모습 말이다. 그런 삶이 가능하다면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별도의 수행이나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이 매일 반복되고 그것을 고요한 마음으로 일생 되풀이 하는 삶을 살면 지루한 것이 아니고 일상이 수행하는 마음의 상태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굳이 마음을 정돈하기 위하여 고요한 곳으로 찾아가거나 특별한 수련의 시간을 따로 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평생을 수행하는 분들도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별도의 시간을 갖는 것을 보면 그런 경지에 다다른다는 것은 평생 어렵겠지만 바람으로 간직할 수는 있을 것이다. 스님들은 여름에는 하안거(夏安居)를, 겨울에는 동안거(冬安居)를 하면서 일상에서 물러나서 고요하게 출입을 금하고 수행하는 시간을 갖고, 가톨릭 신자들도 마음의 수련을 위하여 피정(避靜)을 가서 조용하게 시간을 갖곤 한다. 피정이란 피세정념(避世靜念)을 줄여 부르는 말이니 세상의 번잡함에서 물러나서 고요함을 찾는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성경을 보면 예수님 조차도 제자들에서 벗어나 따로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 기도를 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지 않은가? 불교이든 가톨릭에서든 고요하게 물러나는 일이 중요한 덕목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지팡이에 의지한 노인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노인들의 모습이 오랜 세월동안, 수백 년 동안 되풀이된다는 이야기를 읽으니 일상생활 자체가 변함없이 반복되고 그것이 하안거이기도 하고 피정이기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 마음과 모습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매일 매일 그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 자체가 매일 매일, 고요한 마음으로 오랜 세월동안, 평생을 오늘같이 반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나의 문장에서 여러 가지 상념에 젖은 것은 무더위에 폭우까지 이어져서 밖으로 다니는 일이 쉽지 않아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당분간 밖의 일을 줄이고 조용한 시간을 갖자는 생각이 들어서 책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열심히 그림 그리는 일을 미덕이라 생각하고 살아 왔지만 때로는 그것을 내려 놓고 한발 물러 서서 멈춤의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한 미덕일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고요한 마음으로 매일 매일 숨쉬듯 평생을 반복하는 일이었으면 하는 다짐과 바람을 갖게 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이런 말도 한다. '지금 여기에 행복이 있음을 느끼기 위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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