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천 교수 |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양반전'을 통해 당대 양반 사회의 허위와 위선을 풍자하고, '마장전'을 통해 벗과의 우정론을 설파하였다. 또한, '열하일기'를 통해 새로운 문명에 대한 경이(驚異)를 소설식의 호방한 문체와 해학적 기법으로 날카롭게 비판하여 산문 문학의 절정을 보인 노론 명문가 출신의 문인이자 18세기 경세실용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당대 내로라하는 백탑파(白塔派) 지식인 집단에 속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 등이 연암의 제자들이었으며,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빌미를 제공할 정도로 다양한 글쓰기 방식과 문체를 구사한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더욱이 부인과 사별하고도 재혼도 안 하고 첩도 들이지 않을 정도로 지고지순한 마음을 가진 애처가이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방대한 저술을 통해 국가 제도의 개혁과 목민관의 자세와 법 집행의 공정성 등에 대한 학문적 식견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의학서인 '마과회통'과 '종두심법요지'를 짓고, 나아가 수원 화성 축성의 설계자요 거중기의 개발자이기도 한 백과사전식의 통섭적 지식을 종횡으로 펼친 남인 명문가 출신의 학자이다. 다산을 지탱했던 원초적인 힘은 집안 형제들이었으니, 형 정약전, 정약종 외에도 큰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 누이의 남편이자 다산의 매형인 이승훈, 조카사위 황사영, 이종사촌 윤지충 등 조선 천주교의 핵심 인물들이 다산의 혈족일 정도로 서학에 뿌리 깊은 가문이었다.
연암이 다산보다 25살이 많았고 연암과 다산은 18세기 조선에서 43년 동안 공존했으며 성년 이후로도 25년의 시간이 겹치는 당대 최고의 천재였지만 놀랍게도 이 둘이 교차했던 삶의 지점과 학문적 교감은 찾기 어렵다. 노론과 남인이라는 당파색 외에도 출사에 대한 입장과 기질의 차이가 두 천재의 조우를 갈라놓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이 두 천재의 교점이 될 만한 인물이 정조 임금인데, 정조 시대에 연암은 인생의 성숙기에서 새로운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주었고 다산은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새로운 정치의 실험을 시도하였다.
연암은 입신양명을 멀리하여 특별히 과거에 뜻을 두지 않다가 그의 나이 49세인 1786년에 처음 관직에 올랐지만 주로 한직을 전전할 정도로 중앙 정가에서 이룬 업적은 미미하였으며 말년에는 이마저도 스스로 사직했다. 연암은 당대 사회의 주류인 노론 출신임에도 자신을 스스로 낮춘 타고난 방외인이자 자유인으로 살았으며, '연암집' 57권을 통해 고문과 소품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문체와 번뜩이는 풍자와 해학의 백미를 보여주었다.
반면 다산은 21살에 소과에 입격하고 성균관 유생을 거친 엘리트였다. 비록 노론의 방해와 천주교 집안의 남인 가문이라는 당대 사회의 치명적 약점을 가진 비주류 출신이라는 연유로 27살에 뒤늦게 대과에 급제하였지만 30대 시절의 다산은 늘 정조의 총애가 함께 하면서 승승장구한 정치인이었다. 이후 40대에 다산은 18년 강진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가슴에 맺힌 회한을 학문 연구로 승화시킬 정도로 의지가 강하고 당당했으니, '여유당전서' 등 총 5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길 정도로 박람강기한 학자였다.
비슷할 것 같지만 결이 다른 삶을 산 조선의 두 천재 연암과 다산에게는 글쓰기와 학문의 연찬으로 외롭지 않았으니, 연암에게는 '열하일기'가 있었고 다산에게는 '목민심서'가 있었다. 그리고 연암과 다산이 죽은 후 조선의 19세기는 풍전등화의 상황으로 치달았으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적 상황을 맞이하면서 서서히 근대화의 길을 겪게 되었으니 연암과 다산은 조선 근대의 여명을 앞서 제시한 시대의 선구자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연암이 보여준 글쓰기의 파격은 새로운 글쓰기의 전형(典型)으로, 다산이 보여준 공부의 방법은 새로운 지식 통섭의 전범(典範)으로 다시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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