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우리가 이연걸이라 부르는 배우 리롄제(李連杰, 1963.4.26. ~ )가 세계적 히트작 <매트릭스>에 출연 거부했던 적이 있다. 그 이유를 2018년에야 홍콩 언론사와 인터뷰하며 밝힌다. 자신의 무술 움직임을 촬영 기록하고, 디지털 라이브러리화 하여 그 권리 모두 영화가 갖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무술과 연기를 영화사가 독점, 얼굴만 바꿔 많은 무술영화를 제작한다 하여 거절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읽다 보니 이연걸의 우아한 연기가 떠오른다. 1991년에 개봉한 서극 감독의 영화 <황비홍>으로 그가 일거에 스타가 된다. 무술의 예술적 표현이 돋보여, 세계인의 주목과 사랑이 넘친다. 이연걸이 주로 수련한 무술은 '우슈 장권'이다. 중국 양자강 위쪽의 사권, 화권, 소림권 등의 일부 특징적 기술이 집대성 된 것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태극권, 번자권, 팔극권, 금나술, 솔각 등도 익힌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속 인물 황시샹(黃錫祥, 개명 黃飛鴻, 1847.7.9. ~ 1924.3.25.)은 실존 인물이다.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홍가권, 이후 철선권과 무영각을 익혀 홍가권의 종사가 된 무술인이자 의사다. 무관을 세워 제자 양성에 나서는 한편, 보지림의관(寶芝林醫館)을 세워 뛰어난 의술로 어려운 환자를 보살핀다. 사자춤도 잘 췄다한다.
<황비홍>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변발이다. 윗머리는 밀고 옆과 뒤의 머리카락을 모아 뒤통수에 묶어 따서 늘어트린 것이다. 특히 이연걸과 잘 어울려, 퍽 인상 깊다. 변발은 원래 유목민 머리모양이다. 투구 쓰고 말 타면 머리에 땀이 차 윗머리를 밀었다. 중국 한족은 뒤로 묶는 속발이 보통이었는데,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중국 전역에 변발령을 내린다. 변발하지 않으면 처형도 서슴지 않았다. 동질성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을까? 강제하였던 것이다.
홍타이지(皇太極, 1592 ~ 1643, 청의 황제)는 조선도 속국으로 삼았다. 헌데, 조선에는 변발과 호복을 강제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박지원의 글에 의하면 "그랬다가는 의관에 목숨 거는 조선놈들이 더 날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처럼 활동성이 좋은 옷을 입고 나면 쓸데없이 군사력 증강 같은 실용적이고 활동적인 다른 것에 관심 돌릴지도 모르지. 그냥 지금 쟤들 하는 대로 치렁치렁한 넓은 소매나 상투에 목숨 걸게 만들어서 예법이네 전통이네 따지느라 다른 건 말도 못 꺼내는 저런 식으로 살게 놔두는 게 낫다." 했다 한다. 의관도 자존심이요, 우리는 본디 자존심이 강한 민족 아닌가? 그것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통 머리모양은 민족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성인 남자의 머리모양도 제각각이다. 일본의 촌마개도 변발과 비슷한 것이다. 투구인 가부토를 고정시키기 위해 윗머리는 밀고 남은 머리를 뒤통수로 모아 묶어, 윗머리로 올린다. 이유는 유목민과 비슷하다. 전투 할 때 머리위에 얹는 반구형 철판인 하치(鉢)로 머리에 땀이 찬다. 투구로부터 전해오는 충격을 완화시키기도 했을 법 하다. 그런 일본이 개화하며 머리를 짧게 깎는다.
일본이 조선 강점에 앞서 단발령을 내린다. 형식은 조선 내각의 공포(公布)로 이루어졌으나 일본의 강제였다. 1895, 1900년 두 차례 행해졌으나 일반적으로 부르는 단발령은 1차를 말한다. 효경에 사람의 신체, 터럭,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 하지 않았는가? 물론,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해하지 말고 건강하게 살라는 말이다. 단발은 이를 중시했던 조선인의 사상과 정면 대치된다. 선비와 유생은 물론, 일반인도 크게 반발하였다.
관리가 길거리에서 단속하고 다짜고짜 상투 자르자, 사람이 나돌아 다니지 않았다. 따라서 경제는 물론 사회 곳곳에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를 비롯한 궁중 인사 시해가 일어나 반일정서가 극에 달하고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자존심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이다. 개인이나 국가 모두 자존심이 짓밟히면 거세게 저항한다. 크기나 종류 불문, 인격이고 국격이기 때문이다. 의관과 같은 겉모습뿐이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너무나 쉽게 자신을 버리고 내박친다. 필요에 따라 변하는 것이야 어찌 막으랴? 스스로 변화를 도모하는 것과 강제는 다르다. 막무가내 억압이나 선전선동에 따르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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