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유년시절 아버지께서 즐겨 치던 피아노 건반 위에는 <반달>이라는 노래악보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우리 딸, 우리 딸" 하시며, 정말 단 한번도 저를 꾸중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서 늘 자신만만했고, 주눅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뭘해도 무조건 사랑받는다는 거침없는 자신감은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것 입니다.
최근 삼년 넘게 같이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중증치매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늙어서 망령이 들다.'라는 뜻의 노망(老妄, second childhood)을 경험했습니다. 또 늙어서 다 망각하는 노망(老忘)난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제 할 일은 흰 도화지처럼 기억이 없는 독거노인을 잘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어제에 대한 후회도 원망도 없는, 오늘에서 멈춘 숨쉬는 노인네를, 잘 먹이고 잘 재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몰라보기에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 먹는 격이어서, 아주 예의바르셨습니다. 함께 모시고 사는 동안, 식사 후엔 너무도 겸손한 태도로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하시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아주 정성스럽게 설겆이를 하셨습니다. 이처럼 낮엔 젠틀맨이지만, 매일 새벽 두시엔 공격적으로 변해 유령 물체와 실랑이를 벌이고 큰 소리로 싸워대 저를 깨웠습니다. 이런 아버지와 동고동락하며, 저는 딸로서 후회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2023년 8월 18일 저녁 8시 반. 숨을 거두신 아버지.
사망을 선언하고 얼굴 위로 홑이불을 덮는 순간부터 정신없는 장례절차가 진행됐습니다.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가는 운구차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뒤에 태우고 조수석에 올라탔습니다. 온기가 남은 아버지를 춥고 어두컴컴하고 좁은 냉동실에 밀어넣고, 생애 첫 거대한 이벤트를 준비해야했습니다. 처음엔 무섭고 힘들었던 상태라 모든 게 의미가 없어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의 문자도 다음 날 새벽에 보내게 됐습니다. 이튿날부터 조문을 받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만송이의 국화 꽃들이 아버지의 죽음과 저의 생 앞에 눈부시게 하얀 손을 흔들었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애정 어린 관심으로 달려와 저의 슬픔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눈물에 젖어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은 KDI 선임연구원 우천식 박사님께서 저에게 보내주신 위로의 글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함께 하지 못했지만, 장선생을 아끼고 장선생을 있게 하신 아버님의 높은 뜻을 기리는 많은 분들이 함께 하셨으리라… 개인적인 아쉬움과 미안함을 애써 삼켜 달래봅니다.
사람은 태어날때 '0'을 벗어나면서 부터 세 번의 문(門)을 통해서 온전체 '1'에 다가선다고 합니다. 혼인으로 나 아닌 타인체에 눈을 뜰 때 첫번째 1/3의 문, 타인 간 지고지순한 사랑과 신뢰의 화생체로서 자식을 나을 때 두 번째 1/3의 문, 그리고 마지막 자기를 있게 한 부모님이 숙업을 다하고 세상을 뜨실 때 마지막 1/3의 문이 열립니다.
존재에 대한, 존재의 '증지(證紙)' 과정이자 우주의 호흡 과정인 것이죠. 장 선생님은 이제 아버님께서 떠나시게 되면서 태근의 은혜가 아닌 생근의 공덕으로 앞으로의 남은 1/3을 완성하셔야 할 문에 드시는 것입니다.
타고난 인연은 머물다 기울다 사라지는 법, 그 허전한 공간을 만들고 가꾼 인연으로 채우고 꽃피게 하는 것이 생멸의 원리이고 우주의 호흡, 부모님 은혜에 화응하는 도리일지니… 아버님 소천 길 잘 받들어, 모든 가족분들과의 보중 자애속에 온전체 '1'로서의 보다 밝고 높은 사랑과 봉헌의 뜻을 키워나가시길 기원하고 성원합니다. 우천식》
KDI 우천식 박사님 말씀처럼, 앞으로 저는 인생의 나머지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에, 저라는 존재가 뿌리가 잘린 선물용 꽃다발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약함과 허무함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새로운 생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곁에서 위로해주시는 이웃의 다정한 숨결 때문이었습니다. 삶의 변곡점에서 앞으로 여러분들과 새로운 초월 함수 곡선을 그려나갈 것입니다.
설탕 봉지처럼 작고 하얀 가루로 변신한 아버지의 애틋한 마지막 모습은 세종특별자치시 은하수 공원 바닥 반지름 10cm 작은 원기둥 흙 밑으로 모셔졌고, 푸른 잔디 한장을 위한 거름이 되었습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 배에~' 지금 이 순간도 저의 시린 가슴 속에서는 아버지가 어린시절 들려주던 노래가 잔잔히 흐릅니다. <반달> 가사에 촉촉한 물기를 머금습니다… 그래서 2절을 더 찾아 적어봅니다. 아버지를 다시는 못 보는 은하수로 떠나 보내며….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이번 부고를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 인사 올립니다.
장주영/수필가
장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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