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이 없는 여름은 내겐 의미가 없다. 과일은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지만 수박은 내가 최고로 애정하는 과일이다. 일과 더위에 지쳐 혀를 빼물고 터덜터덜 퇴근하는 한여름, 저녁밥을 먹고 난 후의 후식은 필수다. 찬물로 샤워하고 먹는 달콤 아삭한 수박 한 대접. 밥수저로 수박 한 덩이를 입에 넣고 씹으면 입 안에 가득한 시원하고 달디 단 물은 무더위를 싹 가셔준다.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까. 술을 좋아하는 후배는 샤워후의 캔 맥주 맛이 그렇다고 했다. 혀를 얼얼하게 하는 시원하고 톡 쏘는 맛이라나? 요즘 나를 심쿵하게 하는 배우가 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눈빛을 가진 손석구다. 가수는 노래를 잘 불러야 하고 기자는 기사를 잘 써야 하듯 배우는 연기를 잘하는 것이 최고다. '범죄도시2'의 강해상 역할을 손석구 말고 누가 할 수 있을까. 손석구의 맥주 광고를 볼 때마다 후배 생각이 난다.
올 여름은 수박이 금값이다. 마트에 가면 입이 떡 벌어진다. 수박 한 통에 3만원 한다. 지난 주 아침 뉴스에선 5만원까지 올랐다며 카페에 수박주스가 자취를 감췄단다. 한달 전보다 무려 80% 오른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부담없이 먹었는데 지금은 엄두도 못낸다. 월급쟁이 서민의 지갑은 금수박을 사기엔 너무 얄팍하다. 다행히 동네 마트에선 종종 반으로 자른 수박을 판다. 사실 이것도 만만찮다. 올 여름은 한 대여섯 번 사 먹었나? 얼마 전엔 트럭에서 파는 수박을 한 통 샀는데 맹탕이었다. 욕을 바가지로 하면서 그래도 다 먹어치웠다. 어느날 회사 아래 마트에 가보니 5㎏에 1만2천원 하길래 얼른 샀다. 단지 꼭지가 없어 좀 싸게 판다고 했다. 음, 일단 색도 진하고 묵직했다. 무엇보다 어느 지역에서 생산했다는 상표가 붙어 있었다. 아쉽게도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는 수박은 아니었다. 이게 다 그놈의 이상기후 때문이다.
올 여름은 극단적 이상기후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기후위기는 인류 전체가 직면했다. 지금 같으면 한겨울인 남반구가 20도가 넘는 이상고온을 보이고 북유럽은 난데없이 홍수를 겪었다. 알프스는 눈이 녹아내려 맨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하와이 마우이섬의 산불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한 달 전 집중폭우는 어마무시했다. 이상기후는 가장 먼저 먹거리에 영향을 준다. 가뭄, 폭염, 홍수, 태풍이 널뛰기를 하기 때문에 농산물 생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번엔 유독 충청권의 피해가 심각했다. 청양, 부여 들녘의 비닐하우스가 홍수로 물에 잠겨 썩어문드러진 수박, 멜론을 보는 우리도 안타까운데 농민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잘 익은 수박은 자를 때 안다. 칼을 대자마자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쪼개진다. 진초록의 껍질 속에 빨간 속살의 대비. 아, 정말이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그림 소재는 수박이다. 제목은 '비바 라 비다'. '인생이여, 만세'란 뜻이다. 이 화가도 수박을 꽤나 좋아한 걸까? 수박 만세! <지방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