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왕초 류기곤 교사 |
내년이면 고등학생이 되는 A 군에게 연락이 왔다. 매번 그렇듯 A 군 연락이 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통화하고 얼마 뒤에는 식사하며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4년 전에 처음 만난 A 군은 학교폭력 가해 학생으로 여러 차례 지목돼 학교폭력 담당 교사인 나와 자주 만났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내 앞에서 어두운 얼굴로 앉아있던 A 군의 모습이 익숙했었다. 하지만 요즘 식사하며 밝은 얼굴로 자신의 학교생활을 이야기하는 A 군을 보고 있으면, 학교폭력을 담당하는 교사로서 무엇이 A 군을 변화시켰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폭력 관련 뉴스와 매년 실시하는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가 말해주듯 학교폭력은 여전히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수많은 피해 학생이 학교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겪고 있다. 이렇듯 피해 학생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학교폭력 사안들에 있어 피해 학생을 보호하고 가해 학생을 선도하기 위해 법에 근거해 단호한 조치가 필요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때때로 교사 입장에서는 대화를 통한 갈등 조정이나 선도를 위한 생활지도 등 적절한 학교의 교육과 학부모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사안들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런 경우마저도 학교폭력으로 접수돼 처리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학교폭력 사안에 대한 상황을 바라보는 학교와 학부모의 시야가 좁아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서 이런 상황이 다소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학교의 시야는 학교 고유의 기능인 교육적 접근이 아니라 법령을 근거로 한 행정적 처리가 정해진 기한 안에 흠결 없이 처리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그 바탕에는 행정 처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수로 인해 학교가 무언가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있다. 더불어 학교폭력으로 접수된 사안에 대해서는 공정한 사안 처리를 위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하고, 사안에 대한 심의 전에는 피해와 가해를 단정을 지을 수 없어서 학교가 학생의 지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워지는 것도 시야가 좁아지는 또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학부모의 시야는 '변호'와 '입증'에 집중되는 경향이 많다. 먼저 피해 학생의 학부모는 가해로 지목된 학생에게 엄중한 처벌이 내려질 수 있도록 현재 겪는 자녀의 고통과 상대의 잘못을 입증하는 데 힘을 쏟고, 가해 학생의 학부모는 자녀가 학교폭력 사안으로 인해 불명예스러운 조치를 받거나 학교에서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히지 않도록 변호를 하는 것에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학교와 학부모의 모습은 꽤 당연해 보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대화를 통한 갈등 조정'과 '학생 교육'이며, 피해 학생의 온전한 회복과 가해 학생의 의미 있는 변화를 위한 진정성 있는 고민은 부재하기에 십상이다.
특히 내 경험으로 비춰보았을 때 학교폭력 사안 처리가 끝나고 상대방과 대화를 통해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학부모는 거의 없었다. 이는 학교폭력 사안 처리 과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거치며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교폭력예방법 제1조에 <학교폭력의 예방과 대책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피해 학생의 보호, 가해 학생의 선도·교육 및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 간의 분쟁조정을 통해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고 학생을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육성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법의 목적이 규정되어 있고 해당 조항에는 분명히 '분쟁조정'과 '가해 학생의 선도·교육'이 명시돼 있음에도 학교 현장에서 현실적으로 그러한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적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세종시교육청은 회복적 생활교육의 철학을 바탕으로 세종형 학생 생활교육 정책을 '관계 중심 생활교육'이라고 명명하고, 학교 공동체성 강화와 학생 관계 역량 함양을 목표로 교사·학생·학부모가 공감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 문제의 실천적 해결을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학교는 교육기관으로서 피해 학생의 온전한 회복과 가해 학생의 의미 있는 선도를 위해 고민하고, 학부모는 보호자로서 자녀에게 심리적 안정을 찾아줌과 동시에 당면한 문제를 학교와 협력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