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희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한러혁신센터 선임연구원 |
최근 우리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산업 돌파전략 등을 발표하며 관련 중소·중견기업의 공급망 지원책을 마련하는 한편, 단기적, 중장기적 육성방안을 모색 중이다. 세계 공급망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한국은 매번 리스크 해소를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지만, 고부가가치 제품을 수출하는 산업구조의 취약점은 선진국의 외교 정책에 좌지우지되는 경향을 벗지 못하고 있다.
특히 원재료를 가공하고 수많은 공정기술을 통해 제품을 만드는 핵심 장비들이 국내에서 제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첨단장비의 경우 해외 기업만 바라보는 상황은 중소·중견기업뿐 아니라 대기업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국가적으로 크나큰 손실이다. 장비제조 분야의 원천기술이 부족한 탓에 첨단소재·핵심부품을 제조하는 초 첨단장비의 해외의존성이 클 수밖에 없다. 정보통신기획평가원이 2020년 발표한 '국가연구기술장비 투자현황 및 활용현황에 따르면, 정부예산으로 편성한 연구·산업용 인프라의 내자·외자 비율은 30:70이다. 국가 R&D를 위한 연구장비의 70%가 해외로부터 들어 왔다는 뜻이다. 이는 미국·독일·일본 등 세계 제조강국의 장비산업에 예속돼 있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국내 총생산 대비 R&D 투자 비중이 세계 2위(2021)라는 사실이 무색할 따름이다.
그나마 첨단장비 산업 육성 등 국가단위 프로젝트가 나오고는 있지만, 타깃형 장비 혹은 특정 산업 육성이라는 명목 하의 단기 프로젝트에 그쳐 중·장기적인 전략은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국내 중소·중견기업의 R&D 예산 대비 장비 신설(혹은 개선)을 위한 비용집계는 전무한 현실이기 때문에 이들의 후방을 지원할 만한 전략 수립에도 혼선이 가중되고 있다.
그나마 이러한 상황에서도 국내 학계·연구계에서는 기 구축된 인프라를 기반으로 끈질긴 노력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동원해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내놓고 있어 다행이다. 대학의 경우 각 연구실에 비치된 기초공정·분석 장비를 활용해 수많은 공정에 대한 교육 성과를, 연구소에서는 중장비 혹은 플랜트 시설을 통해 실증공정·분석에 대한 실전 성과를 도출하고 있다. 국내 R&D 인력들이 보유 장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제점을 제시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예산만 주어진다면 세계시장을 주도할 만한 새로운 첨단장비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통해 선진국 반열로의 도약을 경험한 바 있다. 수출 중심의 고부가가치화 제품 생산이 가능했던 것은 국민의 근면·성실 DNA와 첨단 장비의 결합이 만들어낸 성과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는 국가 R&D 개발 목표를 최첨단 장비산업으로 전환하고, 핵심기업을 발굴·육성할 수 있도록 산·학·연·관이 시너지를 내야 할 시점이다. 특히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연구소마다 주어진 고유 임무와 전문성에 맞는 공정·분석 장비를 개발해 산업현장에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화학연구원은 화학분야,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생명분야,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제조분야 원천장비를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지정학(地政學)이 아닌 기정학(技政學) 시대이다. 산업·기술선진국의 자격 조건은 이제 첨단 장비기술 보유 유무가 될 것이라고 본다. 출연연에게는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도할 역량과 임무가 있다. 출연연이 장비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산업계에 이전해 한국 브랜드가 국내를 넘어 세계 시장에 전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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