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광장] 촌계(村契)와 주민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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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광장] 촌계(村契)와 주민자치

정용래 대전 유성구청장

  • 승인 2023-08-16 09:33
  • 심효준 기자심효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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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래 유성구청장
우리는 흔히 주민자치, 지방자치의 원류나 우수사례를 해외에서 찾곤 한다. 민주주의 제도를 오래전부터 정착시킨 나라에서 배울 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선진국의 역사는 민주주의가 경제 발전의 필요충분조건이자 국가라는 마차를 달리게 하는 수레바퀴의 한 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없는 경제 발전은 맹목적이고, 경제 발전 없는 민주주의는 공허하다. 한쪽 바퀴가 부실하거나 빠지면 마차는 달릴 수 없다. 국가나 도시도 그렇다.

프랑스 리옹이 대표적이다. 과거 실크로드의 종착지로 명성을 날렸던 리옹은 19세기 산업혁명의 여파로 쇠락했다. 20세기 중반까지 실업자와 빈집이 넘쳐났다. 하지만 지방분권형 개헌으로 리옹은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1980년대부터 2003년까지 이어진 지방분권형 개혁과 개헌으로 리옹은 강력한 지방조직을 구축했다. '지역의 문제는 지역의 힘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재정과 입법자치권을 가졌다. 이를 바탕으로 지역거점산업과 도시재생사업에 성공하며 프랑스 제2의 도시로 부상했다.

근대의 민주주의 제도로 정착하는 데 실패했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의 주민자치도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힘이 중앙보다 약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로 인한 폐해를 걱정할 정도였다.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가 지방에 처음 가면 면신례(免新禮)라는 일종의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 같은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도 예외 없이 면신례를 거쳤다고 한다. 물론 폐해만 있었던 건 아니다. 지방에서는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지금의 주민자치 조직을 구성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자치 조직인 향약 가운데 하나인 촌계(村契)는 수평적인 주민자치 공동체의 기능을 수행했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를 주관하고, 두레와 같은 노동공동체의 역할도 맡았다. 무엇보다 마을의 임원을 뽑고 지금의 마을회관과 같은 동사(洞舍)를 비롯해 도로·교량 등의 수리는 물론 주민 사이의 분쟁을 조정·징계하는 생활공동체의 기능과 역할이 컸다. 특히 이웃 간에 서로 의지하고 돕도록 생활방식까지 규약에 명시한 것은 당시 척박했던 서민들의 일상과 생명력을 지탱해 주었던 삶의 지혜였다.



다음 달 2일까지 유성구 관내 13개 동 주민총회가 열린다. 지난 9일 노은 1동과 상대동을 시작으로 11일 구즉동, 16일 전민동 등 순차적으로 열리는 이번 주민총회의 주요 안건은 주민참여예산 사업 선정이다. 2011년 2억 8000만 원 규모의 공모사업으로 처음 시작된 유성구 주민참여예산제는 올해 총 13억 원 규모로 크게 늘었다. 올해는 13개 동에서 총 312건이 제안되어 이 가운데 115건(16억 8400만 원)이 주민총회에 상정됐다. 동별 주민자치회의 주민총회에서 사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최종 사업내용과 규모를 확정한다.

주민참여예산 사업은 대부분은 주민들의 일상과 직결된다. 지난해 산책로나 골목 가로등, 방범용 CCTV 설치, 꽃길 조성, 마을축제, 해충퇴치기 설치 등이 주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사업 내용과 조직의 성격만 놓고 보면 조선시대 향약이나 촌계를 지금의 주민자치회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당시의 전통을 현재의 주민자치 제도에 접목할 수 있는지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동네 발전은 우리 손으로!'라는 참여와 주인의식의 전통이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은 자랑할 만하다.

지방분권의 궁극적 지향점은 주민자치 강화이다. 주민이 직접 정책 결정에 참여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과 대의민주주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 유성구가 꿈꾸는 '주민자치 도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주민총회를 준비하고 참여하는 모든 분께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정용래 대전 유성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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