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섭 교수 |
예전엔 어른 세대가 어린 세대를 나무라는 게 일반적이었다면 요즘의 세대 갈등은 어린 세대가 노인을 공격하는 양상을 보인다. 안정적인 사회가 계속되고 평균수명이 괄목할 만하게 늘어나며 기득권을 확보하려는 경쟁 중에 세대교체가 늦어지면서 젊은층이 답답한 울화를 기성세대보다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노인을 공격하는 모양으로 나타내고 있다. 은퇴한 노인세대를 사회에 이바지하는 바가 적은 잉여세대쯤으로 바라보는 편견이 만연한 것이다.
옛날 바이킹들은 곤궁한 계절이 닥치면 노인들을 ‘자살바위’로 내모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노인을 유기하는 일은 중국을 비롯해 유럽과 아프리카 등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고 하는데 역사적인 기록보다는 대개 이야기가 더해져 설화의 형태로 남아있다. 우리도 '고려장'이라는 전설이 있어 늙은 부모를 지게로 져 깊은 산중에 버리려 하자 아들이 나중에 아버지 때 사용할 거라고 지게를 챙기는 바람에 아버지가 잘못을 깨닫고 그만두었다고 하지 않던가. 얼핏 늙고 병든 노인은 사회에 짐이 된다는 생각에 이런 만행들이 생겨난 거라고 짐작한다.
윤리적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함께 나눌 식량이 부족하고 노동력이 생존에 절대적인 시대에는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지식과 경험이 자산이 되는 이 시대에는 실질적으로도 인생을 살면서 터득한 지혜가 소중하게 쓰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고려장과도 비슷한 일본 ‘우바스테’ 설화에는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노인을 산에 유기하라고 영주의 명을 받았지만 자식으로서 차마 그럴 수 없어 마루 밑에 숨겼는데, 어려운 문제를 풀지 못하면 쳐들어오겠다는 이웃 영주의 협박을 노인의 지혜로 해결한 다음부터 노인들을 소중히 대우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평균수명 90을 바라보는 지금 인생의 삼 분의 일을 무력한 노인으로 취급하며 소외하는 것은 분명 온당치 않다.
노인 혐오의 배경에는 노인의 책임도 적지 않다. 오랜 삶에서 터득한 경험을 무기로 권위를 앞세워 강제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떳떳하지 않은 노련한 처세를 삶의 지혜라 강변하지는 않았는지, 남을 배려하기보단 엉뚱한 고집과 파렴치한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았는지, 체면과 명예를 소중히 하기보단 욕심과 몰염치로 일관하지 않았는지……. 모두 살펴볼 일이다.
노인들도 억울함을 호소한다. 전후 국가가 책임져 주지 못하는 황폐한 환경 속에서 산업화의 기적과 선진국의 기틀을 만든 주역인데, 사회는 인정해주려고도 고마워하지도 않는다는 서운함과 자괴감이 ‘태극기부대’와 막무가내 민폐 행동으로 항변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상대를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과 문화생활을 배울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세상이 달라졌으니 선진국 시민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살라고 주문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은 아닌지?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교육하느라 자신을 위해 재산을 모으거나 연금을 부을 기회도 마련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자식조차 버거워하는 세상으로 내몰고 있지는 않은가?
이참에 애처로운 공공근로가 아닌 노인을 위한 멋진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시니어 모델 인기가 높아가듯이 노인을 위한 미용과 패션산업도 활발했으면 좋겠고 소일거리로 취미교실 수준이 아닌 생산적이고 보람 있는 교육과정이 곳곳에서 많이 운용됐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여유 있는 노인들이 지갑을 열어야 한다. 실버산업이 발달하기 위해선 소비시장이 그만큼 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 봐야 자식이나 나라가 가져갈 거 아닌가? 사회는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노인을 대하고, 노인은 젊은이를 호통쳐 가르치는 대상이 아닌 자애로 지혜를 전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노인은 바로 내일의 우리다.
/송복섭 한밭대 건축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