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아들한테 쓰는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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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아들한테 쓰는 반성문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 승인 2023-08-04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달력에 약속 일정이 잡혀 있는지 살폈다. 6월 마지막 토요일에 아들 생일이 들어 있었다. 아내가 있었으면 그 날을 챙기는 모정이 유난스레 꿈틀거렸을 텐데 난 아내의 흉내조차 내질 못했다. 아들한테 가족끼리 외식이나 하라고 인터넷뱅킹으로 마음을 전했다.

왠지 모르는 아들 생각, 아내 생각으로 얼룩진 회상이 날 어렵게 했다. 결혼한 지 4년이 되도록 아빠 엄마가 되지 못해 불안해했던 우리 집에 웃음을 선사했던 보물 같은 아들이었다.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나오느라 그랬던지 유난히도 가슴을 조이게 했던 아들이었다.

태어나기까지는 기다림에 지치게 했지만 세상에 나와선 나름대로 즐거움을 주는 일도 많이 했다. 우선 건강하게 자라줬고, 우량아대회에까지 나가서 표창을 받아 남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공부도 좀 하는 편이어서 중? 고등학교 때에는 학년석차 수위 자리를 거의 놓쳐 본 적이 없었고, 서울대 입시에 합격했을 때엔 우리 부부를 울리기도 했다.

느즈막에 태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한 때는 당혹스럽게, 걱정스럽게 한 때도 있었다.



아들놈이 중학교 시절이었다.

아들이 제법 하는 공부를 더욱 빛을 발하게 하려고 이 아비는 욕심을 냈다. 괜찮다는 평이 나 있는, 영어, 수학 문제집을 사다 주고 풀라 했다. 정해진 날짜에 학습한 내용을 검사하기로 했다. 약속 날짜가 되어 검사를 해 보았다. 한 장 한 장을 넘겨가며 꼼꼼히 살펴보았다. 결과는 5, 6페이지에 불과한 문제를 푸는 체하다가 중단하고 말았다.

문제집을 시작만 해 놓고 중간에 그만 둔 것이었다. 그럴 만한 사유가 있는지 물어 보았다. 아들놈은 별다른 대답을 못했다. 눈감아 줄 만한 어떤 말도 못했다.

건드리지도 않은 문제에 추가 문제까지 더 보태어 풀라 했다. 검사 날짜를 연기하고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

중간고사 성적표가 집으로 왔다. 낙관적인 기대감으로 성적표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학년석차 1위였던 애의 성적이 5위가 되다니 충격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음을 직감하고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허나, 모른 체하고 성적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아내와 같이 걱정을 해가며 수습책을 찾기 위해 골똘히 생각했다. 아내에게 무슨 이상한 기미가 없는지를 살펴보라고 했다.

매일 같이 아들방 청소를 하던 아내가 청소를 마치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들놈 책상 뒤에서 농구에 관한 '챔프'라는 책이 수북이 쌓일 정도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챔프'라는 책의 내용에 흠뻑 빠져 공부를 소홀히 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문제집 푼 것 2차 점검 하는 날이 돌아왔다. 문제집을 펼쳐보니 지난 달 진도 그대로였다. 순간 화가 났다. 문제집 안 푼 거, 성적 떨어진 것, 거기다 공부 소홀히 하고 '챔프'책만 탐독한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용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아비의 마음을 돌릴 만한 말 한 마디 못하고 침묵만 지키고 있으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속상한 김에 양복바지 혁대를 풀러 사정없이 때려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자비하게 혁대 세례를 퍼부은 것 같았다. 그런 후로 부자지간에 갈등의 기류가 형성된 게 분명했다. 부자지간에 서먹한 거리감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성적은 더 떨어지고, 학년석차 5위에서 8위로 곤두박질을 치는 것이었다.

아들도 문제가 있었지만 나의 태도나 사고방식에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들보다도 내게 문제가 더 크다는 걸 절감하고 아들을 다독이는 쪽으로 선회를 했다.

아들은 2,3개월이 지난 뒤에 정상을 되찾아 학년석차 1위, 수위 자리를 되찾게 되었다.

나는 아들한테 혁대 한 번 잘 못 휘두른 것을 평생 후회하며 살고 있다. 그 혁대의 매질은 애한테 깨달음이나 반성 ,다짐은커녕 갈등을 야기하는 매만 난발한 것이었다.

아니, 약효는 없고 육체적 고통과 반감만 사게 하는 기폭제를 동원한 것이 분명했다.

그로 인해 아빠라는 존재는 강압적 위압적 존재의 굴레에 갇혀 사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들 머릿속에는 아빠란 위인이 독선, 아집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각인된 게 분명했다.

혁대 줄 한 번 잘못 휘두른 것이 정답게 사이좋게 지내야 할 부자지간이 이상하게 되고 말았다. 아빠라는 존재는 그저 무섭고 회피하고 싶은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나 자식을 키우는 아빠 엄마들도 혹시 나와 같은 사람은 없는지 자성에 빠져보았으면 좋겠다.

내 그 때 참았어야 했는데, 혁대 세례를 퍼붓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가 막심하다. 혁대 줄 몇 번 휘두르고 이렇게 평생 후회하며 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명색이 선생이란 사람이 이렇게 모자란 행동으로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다니…

교단에서는 제자들에게 후회 없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자신은 평생 만시지탄의 후회 속에 살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부끄러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자격 미달의 애들 아빠요, 학생들을 가르쳤던 교사라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말았다.

교편을 잡았을 땐 그 알량한'엄이자(嚴而慈)'( 잘못이 있을 땐 눈물이 쑥 빠질 정도 엄한 교육을 하고, 잘한 일이 있을 땐 칭찬과 사랑으로 기를 살려 주는 교육) 고육을 한답시고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자식한테는 엄하게만 했고 정작 사랑으로 정겨움을 주는 교육은 흉내도 내지를 못했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사랑하는 아들아!

아직도 풀리지 않은 서운함과 서린 한이 남아 있다면 용서하는 맘으로 날려 주길 바란다.

아들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 아비는 지금 반성문을 쓰고 있다. 내 평생 학생들한테만 쓰게 했던 그 반성문을 지금 내가 쓰고 있다.

어쭙잖은 교육관과 욕심으로 한 때 너를 어렵게 만들었던 일 정말 미안하다.

너도 아빠인 교사인데 아비와 같은 못난이는 되지 말거라.

우리 윤서 사랑과 칭찬을 주식 삼아 잘 키워라.

네 아내한테도, 챙겨야 할 모든 분들께도, 후회가 없도록 잘하고 살아라.

모든 건 흐르고 지나가면 소용없으니 있을 때 잘해라.

소중한 건 잃은 뒤에 후회하는 법이니 있을 때 잘해라.

제자들에게 죄짓지 않는 교사가 되어라. 사랑은 만능의 특효약이다.

여한 없이 사랑으로 교육하고,

있을 때 잘하는 남편이, 아빠가 되어라.

'있을 때 잘해!'

이 한 마디 잊지 말고 실천하며 살아라.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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