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덕분에 한여름 바닷가에서 튜브를 불고 한가롭게 둥실둥실 떠다닐 휴가는 생각도 못 하게 되었다. 대신 침수 피해를 당한 곳을 찾아가 잠시라도 수해복구에 일손이 되고자 찾았는데, 비가 그치고 난 후의 참상은 더더욱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무꼭대기까지 내걸린 흙탕물에 밀려들었던 부산물을 갈퀴로 끄집어내면서 좀처럼 미소를 머금는 것도 객쩍게 느껴졌다. 두 손 걷어붙이고, 진흙탕 속에서 실의에 빠진 이웃을 돌보며 가재도구를 정리하는 이들에서부터 하루아침에 논밭, 비닐하우스, 축사가 사라져 낙담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함께 슬퍼하는 이들의 들썩거리는 어깨도 바라보게 된다.
이 와중에도 내 걸음은 바빴다. 직접 공연예술제를 준비하는데 나선 것도 있지만, 또 통영, 나주, 대전 등지의 다른 여러 공연예술제 이곳저곳을 참관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장 공연장이 침수되어 무대를 잃은 곳도 있지만, 함께 시민들과 축제를 만들어가는 이들은 저마다의 방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저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 일테면 연극을 하는 이들은 연극으로 힘을 보태야 한다는 것, 전쟁통에도 연극이 세상을 위로하고 평화의 희망을 심었듯이 연극제를 통해서 온전히 연극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자는 결의에 찬 의지도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수해복구에 힘을 보태고 피해주민을 위로할 수 있는 참신한 아이디어들도 들어보았으며, 긴급하게 축제 매뉴얼을 점검하면서, 극장축제든 야외축제든 폭우에 따른 무대시설, 기술지원의 여부를 확인하는 긴박한 모습을 바라보기도 했다. 악천후로 초래되는 재원 초과 등 시시각각 벌어지는 하나하나의 문제를 정리하고 대비하면서 축제 준비에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저마다의 역할을 확인하는 모습들. 그 '저마다의 역할', '해야만 하는 일' 가운데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정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란 것도 새삼 알게 된다.
나주에서 극단 큰 들의 마당극 '남명'을 보는데, '백성들을 굽어살피옵소서!'라는 대사가 귀에 박힌다. 지금이 군주제 시대도 아니고 임금이니 백성이니 고루해 보일 수 있으나, '무엇을 했느냐?'라는 대사가 귓전에 맴돌고, '큰 배를 띄울 수도 엎을 수도 있다네.'라는 노랫말도 남다르게 들린다. 어떤 재난을 당했거나 바라보았거나, 그 동시대적인 복잡한 감정의 교차점에서 그 하고많은 연극의 대사 중에 아로새겨지는 것이 젖은 옷을 말릴 틈도 없이, 진창 속에 누가 함께 하고 있느냐는 수재민의 목소리가 저 마당의 목소리로 전해져 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 대사 구절구절에 관객은 끄덕끄덕한 것일 수도 있다.
올해 본 연극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꼽는다면, 나는 '유원'(백온유 원작, 신재훈 각색/전윤환 연출)을 주저 없이 이야기한다. 이 연극은 비극적인 화재 사건에서 살아남은 열여덟 살 주인공 '유원'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데, 극 중 주인공의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자기혐오, 또한 가족을 향한 부채감, 또 주변에 대한 연민 등의 복잡한 감정선이 섬세하게 나타난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상처의 기억 앞에서 진정한 치유와 위로를 끌어내며 부단하게 노력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 연극의 울림은 무척 컸다.
'함께 한다는 것'의 용기는 무엇인가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치유와 위로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오늘 그 축제를 준비하는 이들의 젖은 몸과 우리 앞의 연극에서 확인하게 된다. 돌아오는 길. 와이퍼가 빗방울을 시원하게 밀어내는데, 아, 연극은 이런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흐린 앞을 밀어내며 환히 앞을 끊임없이 내다보게 할 수 있는. 우리 예술인의 소명이 그러하다는 것을./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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