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태 교수 |
80년대 초반, 나는 동해안 작은 어촌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땡땡땡’ 종소리와 함께 새로운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시면서 신학기 첫날 아침 조회가 시작되었다. 약간 각진 얼굴의 젊은 선생님은 키가 정말 큰 느낌이 들었다. 그분은 칠십육 명이나 되는 아이들 이름을 한 명씩 부르시면서 유심히 우리 얼굴을 살펴보셨다. 그리고 나서 약간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친구들하고 친하게 지내라. 그리고 이게 우리 교훈이다!" 선생님은 분필을 들고 칠판에 크게 우리가 일 년 동안 매번 외쳐야 할 교훈을 적기 시작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 자 따라 하자. 공부해서 남 주자! 세 번 복창한다. 실시!" 우리는 이날부터 5학년이 끝날 때까지 매일, 이 교훈을 외치고 또 외쳐야 했다. 가끔 꿈에서 환청이 들릴 정도였다.
잠시 후 한 아이가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며칠 감지 않은 듯 떡진 머리에 웃옷은 털면 금방이라도 이가 떨어질 듯 꾀죄죄했다. 낡은 검은색 바지는 오다가 넘어진 듯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 아이와 짝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교실에서 혼자 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아이는 한참 둘러보다가 쭈뼛쭈뼛 내 옆에 와서 앉고 말았다. 무슨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슬며시 코를 잡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어서 선생님은 복장검사와 실내화 검사를 하셨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아이가 맨발인 것을 발견하셨다. 그 많은 아이 중에 유일하게 실내화가 없었던 것이다. 3월 초 마룻바닥은 꽤나 차가운 편이었다. 조회가 끝나고 잠시 교무실에 다녀오신 선생님 손에는 실내화가 한 켤레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그 신발을 신겨주셨다. 선생님은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한마디 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
우리 반은 유난히 말썽꾸러기들이 많았다. 매일 숙제를 안 해오는 아이들이 많았고 지각을 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싸움이 붙을 때도 많았다. 선생님은 그때마다 칠판 위에 올려놓았던 회초리를 내렸다. 규율을 지키지 않은 아이들은 바지를 걷고 회초리를 맞았다. 가끔은 자습시간에 떠들다가 단체기합이라는 이유로 전체가 엉덩이를 맞았다.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맞은 것은 집에 가면 절대 비밀이었다. 만약 부모님이 아시는 날에는 오히려 꾸중을 호되게 들을 것이 분명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를 써 주셨다. 어떤 내용인지 살짝 편지를 꺼내 보았다. 아버지는 선생님께 최고의 예의를 갖춰서 글을 쓰셨고 마지막에 이렇게 쓰셨다. "저희 아이가 부족하오니 많이 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그때 우리 부모님이 자식을 때려 달라고 부탁하시는 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4월로 들어선 어느 이른 아침, 학교 숙직실 앞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우리 담임 선생님이 어떤 아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수건으로 말려주고 계셨다. 그날 이후로 내 짝은 깔끔하게 변해 있었다. 그 친구의 더러웠던 셔츠와 바지는 낡았지만 깨끗하게 세탁이 되어 있었고, 머리도 짧게 정돈돼 있었다.
공부를 포기했던 아이가 내게 자꾸 교과서 내용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생각과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그 후 나는 그 친구와 초·중·고 동창이 됐다. 그리고 그 친구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때 우리가 선생님에게 배운 것은 단순한 한마디였다. "공부해서 남 주자!" 그리고 남을 배려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다. 선생님은 잘못한 것은 따끔하게 회초리로 때려서라도 그 잘못을 깨닫게 해주셨다.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내 마음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우리 선생님이 무척이나 그립다!
/김정태 배재대 글로벌비즈니스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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