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학교 다닐 때 두발, 복장 등 용모검사와 소지품검사 등이 있었다. 흉기 소지는 말할 것도 없고, 머리가 기준치 보다 길다던가, 바지폭이 넓다고 처벌 받기도 했다. 깨끗한 몸, 단정한 복장 등 생활지도 일환이라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선악을 떠나 자유가 확대되는 쪽으로 바뀌어 왔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작가는 잘 꾸미지 않는다. 진솔, 순수함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생긴 그대로, 변화해가는 그대로 산다. 공부할 때는 물들인 군복 바지저고리에 고무신 차림이었다. 일하는 나이에도 작업복 차림을 선호했다. 그런데 진짜 같은 거짓이 작품 아니던가? 다른 것을 더해서 장식하는 꾸미기와 본질을 아름답게 하는 가꾸기를 혼동한 것은 아닐까?
똑같은 일을 두고, 남이 시키는 것에는 부정적이지만, 스스로 하면 거리낄 것이 없다. 외모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하는 것은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그런데, 외모는 왜 가꿀까? 실은 타의에 의존하는 것은 아닐까? 개인이나 사회 모두 생각의 괴리도 존재한다.
문득, 생각과 행동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첫 인상이 얼마나 중요한가? 심신을 단정히 하라. 훈도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늘 하는 이야기다.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고 반듯하게 하라는 뜻이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가꾸라는 말과 다를 게 무엇인가? 왜, 스스로는 자신의 외모를 가꾸려 하지 않았을까?
중국 《신당서(新唐書)》〈선거지(選擧志)〉에 관리 선별 방법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들었다. 신(身)은 건장한 풍채와 용모, 언(言)은 분명한 말투나 말솜씨, 서(書)는 글씨와 문장력, 판(判)은 이치에 맞는 판단력을 의미한다. 작게 보면 신이 외모에 해당하지만, 종합적 외모인 풍모란, 얼굴, 몸매, 복장, 태도, 의사표현 등 모두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 신언서판이 곧 외모란 말이다. 고려나 조선에서도 준용하였다. 변화는 있지만,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면접에 합격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한다. 면접뿐인가? 교재, 연애, 결혼, 승진 등 생활 전반에 크고 작은 영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름답게 가꾸라는 말이다. 얼굴 생김새만 의미하는 것이 아닌데, 성형도 불사한다. 그것은 꾸미는 일이다.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외모지상주의, 루키즘(lookism)은 2000년 8월 <뉴욕타임즈> 칼럼에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처음 사용했다. 새로운 차별주의 형태로 설명했다고 한다. 외모가 우열을 가르고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거나 성공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가치관이나 사회적 풍토이다. 인종, 성별, 종교, 이념과 같이 역사의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된다고 보았다. 루키즘이 한국이 더 강하다거나, 남성보다 여성이 좀 더 강하다는 통계도 있다.
당연히 외모지상주의도 거부한다. 꾸미는 것도 멀리한다.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도 않는다. 어찌 보이는 것만으로 귀중한 사람을 알 수 있으랴? 인간이기에 서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장중한 내면이 더 소중하게 평가되고 인생의 성패에 더 영향을 준다. 멋지게 가꾸어야할 권리와 의무도 있다. 때때로 변화가 필요하기도 하다.
유명인 또는 고위직 사람에게서 근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다거나 후광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더러 듣는다.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다고도 한다. 그가 가진 고매한 인품, 품격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수 있다. 한편, 명성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자리 또는 환경에 의해 그리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자리에 이르면, 으레 코디네이터가 붙는다. 가꾸어진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자신을 가꾸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꾸미지도 않았지만, 가꾸지도 않았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섰더니, 얼굴에 잡티와 검버섯이 많던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 토끼눈으로 필자를 바라본다. 별걸 다 닮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주위의 권유도 떠오른다. 꾸미진 않더라도 가꾸어 볼 일이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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