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농작물 손해 조사원(손해평가사)으로 청주와 괴산 일대에서 피해조사를 다녔다. 하천변의 한 과수원은 폭우에 휩쓸려 무늬만 과수원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키가 멀대처럼 자란 옥수수는 이번 호우에 두둑이 약해져 발을 제대로 짚고 있지 못하고 픽픽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4월경에 온 냉해로 옥수수알이 들어차지도 않았는데 호우로 피해는 더 커졌다. 어느 사과 과수원은 냉해에 우박피해, 호우까지 자연재해 3종 세트를 맞아 주인장의 마음에까지 먹구름이 가득했다. 하천이 범람한 곳은 곳곳에 도로가 유실되어 조사지역까지 들어가는데도 애를 먹었다. 정말 자연재해 앞에 인간이 만든 제방도 댐도 속수무책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수가 이토록 어려운 일이구나 싶었다. 그나마 재해보험이라도 나와서 그 분들에게 조금의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옛 중국의 설화에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순 임금에게 나라를 물려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전 중국은 7년 가뭄에 9년 홍수가 드는 땅이었다고 한다. 그는 물길을 터주는 방식으로 8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치수를 했는데, 집 앞을 3번이나 지나치면서도 들르지 않았다고 한다.
무릇 한 나라의 임금은 백성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가장 좋은 본보기가 현장을 돌며 아픔을 위로하고 방제 대책을 세우고,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미리 방제계획을 실행하는 것이다. 윤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을 때, 한국의 홍수 사태에 대해 대통령실에서 '당장 대통령이 서울로 달려간다고 별 수가 있겠느냐'는 안일한 해명을 했다가 국민 정서를 건드리고 말았다. 지지율도 하락하고 있다. 상황인식이 국민의 마음에 가 닿아 있지 않으면 아마 임기 내내 지지율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기후위기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21세기 지구촌 어젠다이기도 하다. 나는 코로나19 때 K-방역이 나왔던 것처럼 우리나라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K-방제시스템과 기후위기 대응 모범국가가 되었으면 한다. 우 임금처럼 대통령이 솔선수범하여 현장을 돌며 전문가들과 논의하고 방제시스템을 챙긴다면 분명 국민들도 움직일 것이다.
아직 집중호우가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에도 폭우가 쏟아지고 문자메시지에 호우주우보가 매 시간마다 띵동하며 날아든다. 집에도 누수가 있어서 벽면에 습이 차오르고 있다. 나는 예전에 쓴 <호우주의보> 시 한 편을 꺼내보았다. 우리는 선조에게 이 땅을 선물 받았고, 후대에게는 빌려 사용하고 있는 입장이다. 어쩌면 빚진 자들이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나도 빚진 마음이 있어야겠다/평생 갚을지 모를…/남동풍을 따라 장마전선이 북상했다/하루반나절/디지털 바코드같은 비가 내리고/또 반나절은 내 속에서 멜랑꼴리한 먹구름이/삐쳐나오려는 전기자극을 움켜쥐고 있었다/남에게 싫은 소리도 들었어야 했다/한 푼 빚지는 걸 못 참아 할 일도 아니었다/빚이 있다는 이유로 내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래야 했다/장마비로 옷장 안이 눅눅하다/천정 틈으로 스며든 물기에 얼룩이 벽지를 타고 내려왔다/사람과 사람사이 눅눅한 얼룩이 핀다/디지털 바코드같은 비가 내리는/굵고 가늘고 가늘고 굵은….
김재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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