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존재임이 분명한 반면 많아도 걱정, 적어도 걱정이다. 때에 따라 재앙이 된다. 홍수와 가뭄이 대표적이다. 자연이 짓궂은 것일까? 항상 변화무쌍하다. 그것도 예측 불허다. 올해도 여지없이 둘 다보여주고 있다. 봄 가뭄에 몹시 시달리다, 이제 숨 돌리나 했는데 장마 비가 나라를 마구 흔들어 놓는다. 경기는 의외성이 흥밋거리가 되지만, 자연은 의외성이 감당하기 어려운 재해가 된다.
자고로 치산치수는 정치의 기본 아닌가? 초등학교 상식이다. 치산치수의 기본은 조림, 사방, 저수, 준설과 제방 아닌가? 그런데도 부단히 반복된다.
기후변화에만 죄를 물을 일인가? 궁평지하차도와 같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책임 등 공직자만 탓할 일도 아니다. 사후 약방문에 불과하다. 사방 공사 미흡으로 산사태가 나고, 준설도 하지 않고 제방도 관리되지 않아 물이 넘치고 강둑이 무너진다. 사고 당시만 야단법석이다가 까맣게 잊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심모원려(深謀遠慮)로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고 방비해야한다.
전문적인 환경 논리가 아니다. 자연강과 문명강을 구분할 줄 알아야한다. 둘을 착각하여 우를 범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자연강을 찬탈하고 파괴하는 것은 필자 역시 반대한다. 문명강은 인류의 직접적 삶의 터전이다. 생활, 농업, 공업용수로 활용되어야 한다. 치수, 이수, 배수 정화, 생물, 발전, 유락을 문명강의 7대 기능이라 하지 않는가? 생태만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인공이 가미된 것에는 자연친화적인 모든 지식과 기술을 동원해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은 북악아래 경복궁을 지었다. 돌아가며 한양성곽을 쌓는데 타락산과 목멱산 사이에 청계천이 흐른다. 오간수문을 만들고 그 위에 성을 쌓는다. 수문으로 사람이 드나들 것이 걱정되어 경비목적으로 쇠창살을 박는다. 쇠창살 때문에 부유물, 토사가 쌓여 비가 조금 와도 청계천이 범람하고 물에 잠긴다. 1410년(태종 10년) 큰 홍수가 발생하자, 1411년 개천도감을 설치하여 청개천 개보수가 있었다. 이후 오랫동안 준설 하지 않고 한양 인구가 증가되자, 폐기물과 생활오수로 환경오염이 심각해진다. 게다가 홍수 피해가 반복되고 급기야 익사자도 발생한다. 비로소 영조대왕이 준설에 나선다. 만류하는 사람에게 한 말이다. "100년은 안심할 것이다. 경은 수작하지 말고 물러가라." 실제로 공사이후 한 동안 비피해가 없었다 한다. 비판이 있다고 멈추어선 안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백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8년 동안이나 기술, 재정, 인력 등 치밀하게 준비한다. 임시관청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고, 1760년 2월 18일부터 57일간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다.
연인원 21만 5,300명이 동원되고, 현금 3만5000냥과 2300석의 쌀이 투입된다. 조선 최대 토목공사였다. 실명제로 부실공사를 방지하고, 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때 작성된 <준천사실>과 <준첩도> 등이 전해온다.
수문상친림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 1760, 비단에 채색, 34.2×22.0cm, 부산박물관 |
공사현장에 영조가 찾아와 참관하고 현황을 보고 받는다. 천막 아래 내관이 일산을 들고 있다. 일산 아래 왕을 표시하는 의자가 있다. 보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관료들이 엎드려있고, 수행관원과 내관 여럿이 늘어서 있다. 그 바깥쪽으로 조총과 활, 창 든 무사들이 경계를 펴고 있다. 수문 아래 빨간 기로 경계 표시 해 놓고, 소가 끄는 쟁기와 세 사람이 한조가 된 삽질 등 작업하는 모습이 보인다. 인부 행색도 모두 달라, 다양한 부류가 공사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좌우에 새참 준비도 하고 있고, 서거니 앉거니, 구경꾼도 즐비하다. 군중 사이에 사모 쓴 사람이 보이는 데, 공사 내용 및 현황을 설명하는 모양이다. 천변에 버드나무를 비롯한 활엽수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는데, 조림·사방사업도 하였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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