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숙모님의 마늘 한 접이 날 울립니다

  • 오피니언
  • 문예공론

[수필 톡] 숙모님의 마늘 한 접이 날 울립니다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 승인 2023-07-21 00:00
  • 수정 2023-07-23 10:21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문단 데뷔로 끌쩍거린 수필이 180 편을 넘었다. 그 중 ⅓ 정도의 작품을 가려내어 수필집을 냈다. < 발신인 없는 택배 >가 처녀작 수필집 창간호로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 땀과 집념의 노작이라서 그런지 애 첫 아빠가 된 기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출판사에서 갓 나온 수필집을 보았다. 선산에 계신 조상님들 생각이 났다. 게다가 그림자처럼 평생 곁을 지키다 갔던 모나리자 미소의 얼굴까지 떠올랐다.

책이 세인들 손에 쥐어지기 전에 조상님 상석에 바치고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음수사원(飮水思源)하는 마음으로 < 발신인 없는 택배 > 몇 권을 들고 고향으로 향했다.



차편은 버스로 갈까, 승용차를 가지고 갈까 고심하다가 버스를 택했다. 승용차를 가지고 가면 숙모님께서 많이 걱정을 하시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차를 가지고 고향엘 갔다가 도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걸로 당신의 큰조카는 운전 못하는 사람으로 찍혀 버렸다. 그 뒤부터 숙모님께서는 부모님의 걱정까지 도맡아 해 주셨으니 불안케 해 드릴 수가 없었다.

고향에 있는 셋째 동생한테 고향 간다고 전화를 했다. 차 몰고 가는 것을 숙모님께서 걱정하셔서 버스를 타고 간다고 했다. 흥부 사촌 같은 셋째 동생이 마중을 나왔다. 촌길 50 리나 되는 예산 복합터미널까지 승용차로 마중을 나왔다. 동생 차를 타고 편하게 숙모님 댁에 도착됐다. 투석환자이신 숙부님과 치매기가 있으신 숙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두 분은 영락없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였다. 순간순간 부모님이 되어 대리 만족을 시켜 주시고 있는 것이었다. 눈물이 나왔다. 부모님 대리만족을 시켜 주실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걸 생각하니 인생무상이 원망스러웠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부모님 대행을 해 주시는 마지막 보루가 무너질 날이 얼마 안 남은 거 같아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선산으로 향했다. 가는 길 주변엔 황금 들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태풍 세례로 논배미 벼가 엎쳐 싹이 트는 데가 많았다. 안타까움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여기저기 누워 있는 벼논배미를 보고 동생이 말을 꺼냈다.

"논배미 벼 엎친 정도를 보면 그 주인의 욕심 정도를 알 수 있어요. 제일 많이 엎친 논은 김○○네 논, 그 밑에 좀 덜 엎친 논배미는 양○○네 논, 그 위로 올라가서 거의 벼가 엎치지 않은 논은 이○○네 논인데, 어쩌면 저렇게 논배미 주인 욕심 순으로 벼가 엎쳤는지 신기하기만 하네요."

무심코 던진 말이었지만 예사로 들을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의 일은 욕심으로 되는 것도 있지만 과욕은 금물이라는 생각이 났다. 벼가 많이 엎치고 덜 엎친 순서가 바로 비료를 많이 주고 덜 준 순서라는 거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귀가 솔깃했다.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임에 틀림없었다.

산수(傘壽:80세) 연세에도 숙모님께서는 점심 준비를 하시는 것 같았다. 죄송하고 안타까워 못하시게 했다. 광시 한우 집 식당에 가서 갈비탕 잡숫자고 했다. 처음엔 내키지 않으셨는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셨다. 잠시 후 간절한 애원이 통했는지 나한테 져 주셨다. 광시 식당으로 가려고 동생이 차 시동을 걸었다. 숙부님도 숙모님도 차에 오르시기 직전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밤과 내 좋아하는 머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 선산에 갔다 오는 동안 준비해 놓으신 것 같았다. 바리바리 싼 실한 알밤 봉지가, 연한 머위 비닐봉지가, 눈시울을 붉히게 하고 있었다. 그것으로도 안 되겠던지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마늘 한 접을 떼어 주신다고, 숙모님께서는 의자에 올라가 안간 힘을 쓰고 계셨다.

힘도 없는 팔로 그걸 내리느라 끙끙대시는 거였다. 치매기가 있으신 숙모님이, 약간은 꾸부정한 그 노구가, 야윌 대로 야윈 그 손목이,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날 울리고 있었다. 기억력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라도 더 챙겨 주시려는, 모성 본능의 그 정성이, 그 사랑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치매기로 지워져가는 내 모습이 완전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았다. 만시지탄이 내 것이 될까봐 걱정이 됐다. 때를 놓친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전화를 드렸다. 기억력 사라지기 전에 어머니 같은 음성을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어서였다. 순간 백유읍장(伯兪泣杖)이란 고사가 스치고 지나갔다.

백유가 어렸을 때 잘못으로 어머니 회초리를 맞았다. 그 때는 젊은 엄마의 매였기 때문에 많이도 아팠다. 그런데 백유가 어른이 돼 잘못으로 어머니 회초리를 맞을 때에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연만하신 어머니가 기력이 쇠약해지셨기 때문이었다. 이에 백유는 노약해지신 어머니가 안타까웠다. 그래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를 생각하여 백유는 마음으로 울었다. 이게 바로 효심으로 심금을 울리는 백유읍장 고사이다.

숙모님의 마늘 한 접이 날 울립니다.

알밤 봉지 속에 숨 쉬고 있는, 그 정성, 그 사랑이,

머위 순마다 대마다 묻어나는, 어머닐 대신한 그 손길이,

그 사랑이, 나를 마음 아프게, 힘들게, 헤집어 파고 있었다.

얼마 있으면 나도 못 알아 보실까봐

당신 정신 말짱할 때 하나라도 더 챙겨 주시려는 맘으로,

마늘 한 접으로, 백유읍장 고사 주인공 백유를 멀리 쫓아내시면서 고르지 못한 숨소리로, 그 야윈 손길로, 새로운 현대판 고사를 지어내고 계셨다.

숙모님!

그렇게 안 하셔도 돼요,

부디 오래오래 건강만 해주세요.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남상선
남상선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3.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