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윤 전 학장 |
도시의 방문자는 도시계획도를 보기 위해 어두운 밤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마침내 밤이 되자 현장의 공사책임자는 “자 이것이 우리들의 도면이요!”라고 말하며 은하수를 드리운 아름다운 밤하늘을 가리킨다. 가슴이 멍해 허망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 허장한 대화를 통해 우리는 살아온 도시와 떠나온 도시의 무수한 장소적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우리가 만들고자 한 도시에서 우린 과연 무얼 찾고 있는지 반문할 기회를 얻게 된다.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은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인 작가는 상상의 세계에서 그가 보고자 한 도시들에 대해 거침없이 얘기하고 있다. 실제 할리 없고 보이지도 않는 도시들에 대한 얘기는 한편 현재의 기관차처럼 달리는 우리의 도시를 다시 바라보며 사유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칸은 "건축은 잴 수 없음에서 시작되어 잴 수 있음으로 이루어지고 종내는 잴 수 없게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건축은 보이지 않음에서 비롯돼 보임으로 이루고 결국은 다시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매우 숙연하고 진지한 표현을 통해 건축의 물리적 성향보다는 보이지 않는 공간적 측면을 강조했고 늘 물성에 상대적 대화를 통해 자연감에 귀속하는 건축이 되길 원했다. 건축과 도시는 보이지 않는 많은 장소의 연속으로 이뤄져 있다. 도시가 되는 건축, 이탈리아 물의 도시 베니스에 산마르코 광장은 여러 개의 건축으로 에워싼 공간이다. 그곳의 이름이 광장일뿐 어디에도 이렇다 할 공간이 있는 것은 아니며 단지 건축안의 공기처럼 비어 있을 뿐이다.
공원인지 광장인지 교통섬인지, 그 어색함과 비워짐에 인색한 서울 광화문 광장의 역사와 현재를 보면서 뭐랄 수 없는 아쉬움을 느끼며 질문해 본다. 그 터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교통과 소요에 무척이나 시달린 그곳은 그냥 비워진 것만으로도 한동안 족할 것이나 쉬면서 자취가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다시 잊혀진 기억으로 존재감을 지닐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도시의 한 자리가 될 것이다.
어마어마한 규모로 도시의 한복판을 비워 낸 뉴욕의 센트럴 파크나 집요하리만치 건축 옆에서 떠나질 않고 건축과 도시가 하나가 된 런던의 스퀘어(소공원)들, 건축의 높이보다는 지난 하이테크 시대의 기술을 마음껏 건축에 분출한 파리 퐁피두센타의 두드러진 모습은 언제봐도 기념비적이나 실상 그 덩치만큼 앞마당을 크게 비우고 열어둔 광장은 비어냄에서 출발해 결국 보이지 않는 도시를 만든 주역들이라고 본다. 인류가 만든 이 비움의 장소들은 사실 수도 없이 많지만 유독 두드러지게 광장으로 나타난 독재의 공간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진 지 오래됐고 작고 여린 비워진 공간들이 우리 곁을 지킨다.
나폴레옹 시기 이집트를 정복하려 원정에 들어갔던 프랑스는 이집트학의 꽃을 피웠고 이어 건축가 오스만으로 하여금 새로운 파리를 계획해 지금의 파리가 이루어지는 대역사를 기획한다. 중세를 거쳐오며 어지럽고 너절했던 도시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고 그중에 보이지 않는 피리의 모습을 만든 아주 중요한 공동성의 주거 형식을 만들어 냈다. 일정한 높이와 동일 수준의 건축으로 알려졌지만 더욱 큰 오스만 건축의 비밀은 건축과 도시가 보이지 않는 지붕들로 잔물결을 치고 있는 지금의 파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의 또 하나의 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다. 도시 복판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교회)의 배경화법인 공동성 주거 에이샴플라 만자나스가 바로 곁에 두고 다녀오고 머무르고 나서도 인지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도시'의 잔물결의 또 다른 모습이다. /김병윤 전 대전대 디자인아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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