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언론법학자 박용상, 여든살 선생님의 가르침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언론법학자 박용상, 여든살 선생님의 가르침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승인 2023-07-17 08:45
  • 수정 2023-07-17 12:36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이승선 교수
이승선 교수

1971년 6월 13일, 뉴욕타임즈는 미국의 월남전 보고서를 보도했다. 정부의 보도중지 가처분 신청이 인용됐다. 3일 만에 보도가 중지됐다. 6월 18일, 같은 보고서를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지역 연방법원 본안 소송에서 두 신문에 무죄가 선고됐다. 항소심에서 뉴욕타임즈는 유죄, 워싱턴포스트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6월 30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6대3 의견으로 두 신문에 무죄를 확정했다. 아홉 명의 대법관 모두 각자 의견서를 작성했는데, 이례적이었다.

1971년 12월, 학술지 <법조>에 '뉴욕·타임즈지 사건과 워싱턴·포스트지 사건'이란 논문이 게재됐다. 저자는 스물여덟 살의 박용상 법무관이었다. 그는 그해 5월부터 10월까지 '프라이버시의 개념'에 대한 논문을 같은 학술지에 게재했었다. 1970년 미국연방대법원 판례를 기반으로 '언론출판의 자유의 한계'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 유학한 뒤 '출판의 자유에 관한 독일의 학설과 판례'를 학술지에 3회 실었다. 1978년이었다. 박용상은 1980년 서울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출판의 자유와 공적과업'이란 주제였다. 같은 해 '언론기본법' 제정에 참여해 공과를 평가받았다. 법에 반론권과 언론중재제도, 언론의 취재원보호 규정을 도입했다.

박용상은 1967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2년 서울형사지법에 임용된 후 25년 간 판사로 재직했다. 판사 시절 실무서 <법원실무제요>를 기획, 민사편을 집필하고 초대 노동전담재판부 재판장으로 노동소송의 법리와 판례를 형성했다. 1997년부터 8년간 헌법재판소 사무차장과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헌법재판 실무제요>를 발간했다.

퇴임 후 법률사무소를 개소했으나 사건을 수임하지 않고 언론법 연구 공간으로 활용했다.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선관위 인터넷선거보도심의위원회,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언론의 공적과업>을 비롯해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명예훼손법> 등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논문도 수십 편이다. 한국언론법학회 철우언론법상, 한국헌법학회 학술상, 법조언론인클럽 올해의 법조인상을 수상했다. 2023년 5월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에 선정됐다. 문재완 교수가 쓴 "한국 언론법의 설계자, 박용상 변호사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논문에 박용상의 실무적·학술적 업적이 상세하다.



박용상의 업적은 빛나고 화려하다. 그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2023년 7월 현재 그는, 무엇보다 연구자들이 무릇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올해 여든이시다. 1971년 학술지에 '프라이버시'에 관한 '논문'을, 50년이 지난 2020년과 2022년 잇따라 '명예훼손'을 탐구한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했다. 새파랗게 어린 익명의 연구자들에게 기꺼이 심사를 받겠다고 투고한 노장의 논문이었다. 따라갈 수만 있다면 그의 뒤에 비친 그림자 끝을 잡고만 가도 그대로 길이 되지 않겠는가. 그뿐 아니다.

선생님을 초빙한 '언론과 법 마스터 클래스' 강좌가 7월 초부터 세 차례 열렸다.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가 주최했다. 중견 언론인, 법학자, 언론학자 스무명이 수강생이었다. 강의 내용 외에도 선생님께 이런 점을 배웠다.

첫째, 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많은 발표자나 토론자가 시간을 함부로 어긴다. 전체 일정이나 다른 사람이 발언해야 할 시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다. 강의실 벽시계를 수시로 보며 발표 시간을 지키셨다.

둘째, 토론자와 수강생 누가 질문하든 그들의 발언을 반드시 받아 적으셨다. 질문자를 존중하며 성실하게 답변하는 기초였다. 다음 강의 시간에 각각 네쪽, 일곱쪽짜리 답변서까지 제공해주셨다.

 

셋째, 수강생과 토론자들의 비판적인 의견을 흔쾌히 수용했다. 토론자들이 선생님의 견해를 반박할 때도 "그래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라며 빙그레 웃으셨다. 판사 시절의 어떤 판결에 대해 '비난'하는 일부 여론이 있었다고 토론자가 질문했다. 선생님께서는 "판사가 그 정도는 감당해야지요"라고 담담하게 응수했다.

권한과 책임이 주어진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고 묵묵히 감당해 내는 것. 생애를 언론법 연구에 바친 선생님께 2023년 여름에 배우는, 일상의 소소하면서 한 살씩 나이 더해가는 연구자에게 필수적 뼈대가 되는 가르침이다.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고교 당일 급식파업에 학생 단축수업 '파장'
  2. 대전 오월드서 에어컨 실외기 설치 작업자 추락해 사망
  3. 열악했던 대전 여성노숙인 쉼터…지원 손길로 '확 달라졌다'
  4. "뿌리부터 첨단산업까지… 지역과 함께 혁신·성장하는 대학"
  5. 대전 중구 교육부 평생학습도시 신규 선정 '중구가 대학, 온마을이 캠퍼스'
  1. 대전교사들 "학교 CCTV 의무화, 사건 예방에 도움 안돼" 의무화 입법에 반발
  2. 계룡산성 道지정문화재 등록 5년째 '보류'…성벽과 기와 무너지고 흩어져
  3. 대전 금고동 주민들 "매립장·하수처리 공사장 먼지에 농사 망칠판" 호소
  4. 사랑의 재활용 나눔장터 ‘북적북적’
  5.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헤드라인 뉴스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탄핵정국 속 두 쪽으로 갈라진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민주주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4·2 재보궐선거 본 투표 당일인 2일 시의원을 뽑는 대전 유성구 주민에게선 사뭇 비장함이 느껴졌다. '민주주의의 꽃' 선거를 통해 주권재민(主權在民) 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발현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저마다 투표소로 향한 것이다. 오전 10시에 방문한 유성구제2선거구의 온천2동 제6투표소 대전어은중학교는 다소 한산한 풍경이었다. 투표 시작 후 4시간이 흘렀지만 누적 투표수는 고작 200표 남짓에 불과했다. 낮은 투표율을 짐..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국내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이 약 9500여 만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40대 차주의 평균 대출 잔액은 1억 1073만 원으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이 한국은행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말 기준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은 9553만 원으로 조사됐다. 이는 관련 통계가 작성된 지난 2012년 이후 역대 최고 수준이다. 1인당 대출 잔액은 지난 2023년 2분기 말(9332만 원) 이후 6분기 연속 증가했다. 1년 전인 2..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숨겨진 명곡이 재조명 받는다. 1990년대 옷 스타일도 다시금 유행이 돌아오기도 한다. 이를 이른바 '역주행'이라 한다. 단순히 음악과 옷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권은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려 재차 살아난다. 신규 분양이 되며 세대 수 상승에 인구가 늘기도 하고, 옛 정취와 향수가 소비자를 끌어모으기도 한다. 원도심과 신도시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다시금 상권이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는 역주행 상권이 지역에서 다시금 뜨고 있다. 여러 업종이 새롭게 생기고, 뒤섞여 소비자를 불러 모으며 재차 발전한다. 이미 유명한 상권은 자영업자에게 비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 한산한 투표소 한산한 투표소

  •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