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이 많으면 부자가 된다. 과거 친일로 부와 명성까지 쌓았던 인물을 살펴본다.
친일파 거물로 조선을 팔아먹은 이완용(李完用) 외에도 공주 출신 갑부였던 김갑순(金甲淳)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열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되었다.
그가 처음 취업한 곳은 지금으로 치면 공주 교도소에서의 교도관 심부름꾼이었다. 그러다가 그와 의남매를 맺고 있는 여인이 관찰사의 애첩으로 들어가면서 팔자가 바뀐다.
이어 운이 트이면서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는 일찌감치 부동산의 가치에 주목했으며 이를 핑계로 공주와 대전 등에 닥치는 대로 땅을 사기 시작했다.
1930년대 대전읍 면적은 190만7400㎡(57만 8000평)이었는데 김갑순 소유의 땅은 22만 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전에서는 김갑순의 땅을 밟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뿐만 아니라 그 무렵 대전을 포함한 김갑순 소유의 땅은 무려 3300만㎡로 1000만 평에 이르러 충청도 최고의 갑부로 올라섰다고 하니 현대인들로선 상상도 불가능할 정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송곳 박을 땅도 없다'는 속담처럼 지금도 부동산은커녕 남의 집에서 세를 살고 있는 서민이 많다.
세벌이(맞벌이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짬을 내어, 또 하나의 일자리에서 돈을 버는 일)를 해도 부족한 서민은 홑벌이(가정에서 한 사람만이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벎)라고 한다면 말할 나위조차 없을 정도로 궁핍하다.
하물며 이들에게 있어서 서울∼양평 고속도로 신설 구간 공사와 연관된 잡음은 가뜩이나 더워서 짜증이 나는 판에 스트레스까지 가중시키는 단초일 따름이다.
이런 와중에 인기배우 차인표 씨가 작고한 부친 차수웅 우성해운 전 회장이 생전에 물려주고자 했던 물경 371조의 경영권 승계에도 초연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인들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국내 업계 4위이자 전 세계 10위권 수준까지 오르기도 한 우성해운의 경영권을 두고 "평생 우성해운에 몸 바친 분들이 계신데 해운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저와 형제들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는 부분에서는 커다란 존경심이 발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부동산에 투기하면 애먼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논리와 동격의 고운 마인드가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땅이든 재물이든 많이 소유한 자는 사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반면 나처럼 꼴뚜기장수(재산이나 밑천 따위를 모두 없애고 어렵게 사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비루한 처지 서민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마천루를 닮은 아파트 신축 공사를 보는 것조차 심드렁하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시절의 공주 갑부 김갑순을 부러워한다거나 고속도로 신설 구간 공사장 부근에 허름한 맹지(盲地)라도 사두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하지는 않는다.
본디 신은 인간에게 100% 만족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수 이태호의 히트곡 [사는 동안]이 조금은 허전한 내 마음을 위로한다.
=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내 몫만큼 살았습니다 / 바람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젖은 채로 이별 없고 눈물 없는 그런 세상 없겠지만은 / 그래도 사랑하고 웃으며 살고 싶은 고지식한 내 인생 상도 벌도 주지 마오" =
홍경석/ 작가, <두 번은 아파 봐야 인생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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