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인연이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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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디세이] 인연이라고 하죠

양성광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 승인 2023-07-10 08:44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양성광 원장
양성광 원장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내 생애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다시 올 수 있을까요. (중략)이 생에 못한 사랑, 이생에 못한 인연. 먼 길 돌아 다시 만나는 날 나를 놓지 말아요." 이 곡은 가수 이선희가 2005년에 드라마 ‘다모’를 보고 느낀 바를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노래에는 연인과 헤어지는 아픔뿐만 아니라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있다는 불경에서 인연에 대한 가르침,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도 담긴 것 같다. 연인과 헤어짐은 당장에는 절절하겠지만, 후에 다시 만난다면 그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연인과의 사랑도 그럴진대, 하물며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은 또 어떻게 남을까.

20대에 오지에서 첫 근무를 시작할 때 나에게 일과 인생을 함께 가르쳐주던 직속 선배를 지난주 서울에서 개최된 세계한인과학기술인대회에서 우연히 만났다. 캐나다에 이민 가 살고 있어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늘 소식이 궁금했던 선배다. 무척 반가웠는데 막상 몇 마디 못 해 보고 다른 무리에 휩쓸려 눈인사로 헤어지게 됐다. 그런데 저녁에 따로 만나 노포에서 술잔을 기울였다면 그 선배와의 인연은 진행형이 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얘기를 나누고 픈 진짜 이유는 나의 추억 소환용이었지 않았을까? 흐릿한 기억도 되살리고 맞게 수정하기보다는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다.

요즘은 연락이 끊긴 지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면 인스타그램 등 SNS나 인터넷을 뒤져 찾아볼 수 있으니 좋은 세상이다. 그 사람은 인스타그램에 자기의 얘기를, 자기의 관심사를 올리겠지만, 우리는 가상공간에서 그의 일상과 연결돼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도 관계를 맺으려면 그 사람의 SNS 계정을 팔로우하기만 하면 되는 세상이다.



팬들은 좋아하는 스타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그의 일상을 공유하고자 카페 회원이 된다. SNS에서는 주로 일방의 팔로우로 끝나지만, 어떤 때는 의기투합해 서로 맞팔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에게 DM(Direct Message)을 보내 즐겁게 소통하다가도 수가 뒤틀리면 현실로 찾아가 칼부림도 마다치 않는 화끈한 세상이다.

죽기 전에 한 번 더 봤으면 하는 인연 중에는 나처럼 SNS와 친하지 않아서 좀처럼 추적이 안 되는 이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여전히 나를 기억의 한편에 추억으로 저장해 두고 있을까? 어릴 적 추억으로 가끔 생각나던 이가 김 서린 유리창에 새겨진 글자처럼 슬며시 사라지는 일이 자꾸 늘어가는 것을 보니 이제 나도 나이를 먹고 있나 보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이미 잊었지만, 그 기억은 추억으로 어슴푸레 남아있다. 아니 기억을 떠올려서 추억으로 남고, 그 추억을 기억이라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러한 기억마저 세포 노화로 줄어드는 텔로미어(Telomere)처럼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요즘 카톡방은 소규모 친목 모임이었다가 몇 개가 합쳐져서 몇백 명 규모로 진화하는 일이 잦다. 여기에서 가끔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지인들의 소식을 접해 반가울 때도 있으나,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카톡왔숑"은 조용한 탈퇴를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때는 업무 때문에 갑자기 연락할 일이 있어서 알던 사람을 찾으려 하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 전화번호부에서 찾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꾸로 어떤 사람은 전화번호에 저장돼 있는데, 누구인지 전혀 기억을 못 할 때가 있다. 내게는 인연이었는데 상대방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갔던 행인 1, 2이었을 수도 있고, 나는 기억을 못 하는데 상대방에게는 소중했던 추억이거나 끔찍했던 트라우마이었을 수도 있다.

인생 2막에 있는 나에게 인연은 회자정리 후 거자필반의 의미가 강하다. 그러기에 어쩌다 시작한 새 직장에서 맺게 될 새로운 인연은 나에게는 커다란 도전이다. 나의 추억 만들기보다는 상대방에게 거자필반의 인연이 되도록 옷깃을 여미고 귀를 열어야겠다.

/양성광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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