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천 교수 |
그러다가 영화가 내게 준 여운이 채 가라앉기 전에 짐짓 소설 '흑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평소에 김훈의 섬세한 문체와 빛나는 모국어 사용을 흠모했던 나는 작가 김훈의 작품집이 꽂혀있는 서재 책장에서 2011년에 구입 즉시 단숨에 읽었던 소설 '흑산'을 다시 꺼내 곱씹어 보았다. 영화 '자산어보'가 펼쳐 보인 흑백의 파노라마가 사실성을 더해 주었다면 소설 '흑산'은 김훈의 작가 정신에 빛나는 서사적 서정의 힘으로 영화와는 사뭇 결이 다른 몰입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윽고 내게 신산했던 시대의 인물과 조우하게 했다.
정조 임금이 승하하고 1년 뒤인 1801년의 조선은 천주교의 박해와 순교로 피비린내 진동하는 난폭의 시대이자 숨 막히는 질곡의 현장이었다. 이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에 정약전과 그의 형제들이 있었다.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하고 신유박해 때에는 거룩한 순교의 본을 보여준 복자(福者) 정약종과 유배지 강진에서 시대와 처절하게 맞서면서 수백 권의 저술을 남긴 박람강기의 대학자 정약용이 바로 정약전의 동생들이었다. 천주교와는 숙명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대표적인 남인 가문이었던 정약전은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은 권철신 문하에 들어가 천진암 주어사(走魚寺)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운 실학자였으며 유배지 흑산도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시대의 사학죄인(邪學罪人)이었다.
물론 정약전은 아랫동생 정약종이 하늘을 바라보며 참수를 당한 것에 비하면 견고한 신앙을 지키지 못했으며, 막냇동생 정약용이 실학을 집대성하고 해박한 지식의 통섭을 보여준 것에 견주면 학문이 깊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처럼 정약전은 풍채가 늠름했고 유배지 강진에서 보낸 정약용의 글에 성실한 독자였으며 꼼꼼한 비평가였다.
더욱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지은 '자산어보'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물과 어패류 총 55류 226종의 명칭과 분포, 외형적 특성 등 해양생물의 지식을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서 값진 의의를 지닌다. 또한 홍어 장수 문순득의 우여곡절 많았던 동남아시아 해양 표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주고, 이의 전말을 세세하게 기록해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이정표를 세운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짓기도 했다. 실로 의롭고 대단한 근대 조선의 특출한 형제들이라 할 만하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의 서문에서 밝히기를, '흑산'은 어두운 느낌을 주어서 무서웠기에 같은 '검다'의 뜻인 '자산(玆山)'이라고 표현한다고 했다. 이 대목은 소설 '흑산'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정약전이 창대를 불러 말하기를 '자(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 외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이 있음을 말했다. 또한 '자(玆)'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고 한 대목에 이르게 되면 '흑산'이라는 유배지에서 끝내 풀려나지 못할 것을 예감한 정약전이 실낱같은 희망을 '자산어보'라는 이름에 소망처럼 담은 것이리라.
진정 정약전은 억울한 유배 생활에서도 낙담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거처를 서당으로 삼고 '복성재(復性齋)'를 지어 후학을 양성한 시대의 위인이었다. 대표작 '자산어보'는 섬이 주는 고립과 고독에 스스로 갇혀 살지 않고 섬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소탈하게 살았던, 그리하여 스스로를 해배(解配)한 진정한 자유인이었음을 증언한 흔적이며, 또한 '자산어보'는 지난한 삶을 견딘 인간 승리의 생생한 현장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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