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봉 관장 |
사람만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개나 고양이를 친구로 삼으면서도 잘 산다. 개나 고양이와 친구가 되어 사는 사람은 다행이다. 외로움에 치를 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자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이때의 타자가 개나 고양이인들 어떠하랴. 생각해보면 사람이 아닌 개나 고양이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사는 삶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은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변덕이 심하다. 개나 고양이 등 변덕이 심한 동물은 사람만큼이나 비위를 맞추기 힘들다. 이들 동물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차라리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을 친구로 두는 것이 낫겠다는 고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개별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젊었을 때는 이들 짐승 친구보다는 사람 친구를 좀 더 원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사람 친구가 없으면 너무 외로워 견디기 힘들어하기 일쑤이다. 사람들과 더불어 어우렁더우렁 사는 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없다.
친구가 없다고 생각할 때 대부분 사람은 불안해지고 초조해진다. 사람과의 소통이 끊어질 때 대부분 사람은 마음은 물론 몸도 가누기 힘들어한다. 이때 생기는 병이 흔히 말하는 우울증이다. 그래서 그럴까. 많은 젊은이가 혼자 있기를 두려워한다.
이들이 교회에 가거나 절에 가는 것도 실제로는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나 절에 나가게 되면 대부분 사람이 일체감 및 소속감을 느낀다. 일체감 및 소속감을 느끼면 거개(擧皆)의 사람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에게, 아니 목사님이나 스님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예수님 아래, 부처님 아래 하나가 되는 셈이다.
예수님, 부처님 아래 하나가 되면 외롭거나 고독할 까닭이 없다. 이들이 늘 챙겨주고 도와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내 매너리즘에 빠지기 마련이다. 오래지 않아 싫증을 내기 쉽고, 짜증을 내기 쉬운 것이 사람이다. 조금만 예민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내 교회나 절에 가는 일이 지루해지고 고루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거룩한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교회나 절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만큼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난만(爛漫)할 수밖에 없다. 교회나 절도 사람살이의 리얼한 사회적 공간이지 않은가. 어떤 일이든 부정적인 것들이 반복되면 곧바로 의심이 생기는 법이다.
나이가 좀 들게 되면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라도 사람살이의 일반이 시큰둥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직업의 일선에서 은퇴하게 되면 교회나 절이 주는 위안도 별로 신통치 않기 마련이다.
바로 이런 때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친구가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친구가 개나 고양이는 아니다. 개나 고양이처럼 이때의 친구도 물(物)이기는 하다. 동물, 식물, 광물이라고 할 때의 물(物) 말이다.
물(物) 중에 좀 더 은밀하게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것은 동물이기보다 식물이나 광물이다. 풀과 나무도 식물이기는 하지만 정작 나를 따듯하게 보듬는 식물은 농작물이다. 농작물은 언제나 흙이라는 광물을 어머니로 받아들여 세상에 태어난다. 요즈음에는 사람의 가장 근원적인 친구가, 아니 어머니가, 아니 한울님이 흙이라는 생각을 한다. 흙에서 태어나는 농작물이야말로 사람의 외로움과 고독을 씻어주는 참 생명이라고 받아들이는 셈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나는 흙에서 태어나는 농작물과 더불어 삶의 장단을 맞추고 있다.
/이은봉 시인·대전문학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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