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맑게 개인 날/저 푸른 바다 위에 떠 오르는/한 줄기의 연기를 바라보게 될거야./ 하얀 빛깔의 배가 항구에 닿고서/예포를 울릴 때/보라!/그이가 오잖아.-중략'
나는 흥얼거리다가 깜짝 놀랐다. 어려운 오페라 아리아를 내가 이렇듯 부를 수 있다니 기쁘고 신기했다. 사실 음악은 장르 불문하고 좋아하지만, 악기보다는 노래를 좋아하고 대중가요보다는 클래식을 좋아해서 노래책만 수북이 쌓아놓고 있던 터였다.
다만 오페라, 뮤지컬 등 공연을 관람하며 나도 저렇게 노래를 해봤으면 하는 막연하지만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대전시민대학」에 '뮤지컬 클래스'가 개설된 것이다. 하지만 막상 강좌를 신청하고 다녔지만, 뮤지컬 노래는 도무지 익혀지지 않았다.
더욱이 MR반주기에 익숙하지 못한 나는 2개월 과정 종강 후, '연기와 함께하는 성악(오페라 아리아)' 클래스에 등록했다. 이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무척 고된 시간이었지만 그러나 열심히 다녔다. 지도 교수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아니었다면 정말 할 수 없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강습생 대부분이 취미로 하는 일반인으로 음악 기초지식이 전무했다. 그런데도 할 수 있다며 용기 주시던 지도 교수님이 계셨기에 어쭙잖지만 나는 아직 음악에 기대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는가. 지도 교수님은 생명의 은인이시다.
사실 그즈음 노래 부르기는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진 듯 절망에 빠진 나를 위로해 주었다. 부친이 작고하신 후 모친과 단둘이 살다가 모친이 노환으로 노인전문병원에 입원하셨다. 나는 모친 문병을 다녀온 후는 텅 빈 집에서 혼자 책을 읽곤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故) 부친이 거짓말처럼 거실 저만치에 서서 미소 띤 얼굴로 말씀하셨다. "책 읽고 있구나." 생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부친이 반가우면서도, 순간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가려는데 그사이 부친도 사라지시곤 했다. 다행히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밤이 되면 어디엔가 부친이 계실 것만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괜히 이방 저방 열어보는 등 부친이 기다려졌다.
그즈음이었다. 노래를 시작한 시기가 바로 그즈음이었다. 노래를 시작한 후는 거실에도 방에도 집안 빈 공간마다 악보를 펼쳐놓고 연습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어려웠던 시간을 노래로써 극복하지 않았나 싶다. 오직 노래를 배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모친 문병도 서둘러 갔다 왔으니까 말이다. 어디선가 벽에 걸린 액자에 쓰여 있던 글이 생각난다.
"음악은 어떠한 지혜, 어떠한 철학보다도 높은 계시다. 나의 음악의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빠져있는 모든 비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베토벤 서한집에서
노래 강좌는 학기가 끝날 때마다 복병처럼 학습자 발표가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곤욕을 치렀다. 방안 퉁소라고 별명이 붙을 만큼 남 앞에서는 무엇이든 해본 적이 없는 내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려니 실수투성이였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악보를 보고하는 데도 한참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디인지 몰라 당황하기 일쑤였다.
더구나 학습자 발표 때마다 해당 교수님께서 권해주는 곡은 마다하고 내가 부르고 싶은 곡을, 음정 박자 틀리면서도 불러서 눈총받는 것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그 시간이 못내 즐겁기만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봤다는 성취감이 흡족했음이다. 그렇게 무대에서 실수를 거듭하면서 차츰 노래에 자신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전·충청가곡연주회」에서 매달 연주회를 갖게 된 것은 정말 내게는 획기적인 기회였다. 노래를 배우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실은 노래를 부르면서 어려움을 잊었던 것 같다. 한번은「대전충청가곡연주회」연주회를 앞두고 하필 전날 모친이 위중하셨다. 노인병원에서 밤새 모친을 간병하고 이튿날 곧바로 연주장으로 갔더니, 천정이 노랗게 보였다.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무대에 올라갔지만, 첫 음을 놓치고 말았다.
텅 빈 무대에서 비 맞은 생쥐처럼 민망하게 서 있는 내게 객석에 있던 관객들이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 주며 어서 다시 하라고 하기에 애써 끝까지 부르기는 했지만 나 자신에 회의가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내가 노래를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였다.
그때였다. 테너 K 선생님이 내 앞에 오시더니 나직이 말씀하셨다. "본인은 못 했다고 생각하지만,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 한마디의 말이 내게는 억만금의 금붙이보다도 소중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나는 그 후 무대에 설 때마다 주문(呪文)처럼 그 말을 떠올리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힘이 불끈 솟곤 했다.
또 한 번은 모친 문병 갈 때였는데, 나는 문병을 갈 때 차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를 피해 주택가 골목으로 걸어 다니면서 노래를 불렀다. 한적한 골목에는 집 앞에 평상을 내놓고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곤 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무심히 그 옆을 지나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등 뒤에서 어르신이 불렀다. 나는 순간 내가 뭘 잘못했나? 해서 빠르게 내 발아래부터 훑어본 후 뒤돌아보았더니, 예상과는 달리 어르신은 빙긋이 웃으시면서 이리 와서 그 노래를 좀 불러 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 노래는 그즈음 배우기 시작한 이탈리아 가곡 '아마릴리, 내 사랑(G. 카치니 곡)'이었다.
우리 모친 같았으면 시끄럽다고 저리 가서 부르든지 말든지 라며 핀잔했을 터인데, 그 어르신들은 미소 지은 얼굴로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가 조금만 잘 불렀어도 그 어르신들 앞에서 불러드렸을 것이다. 그때 그분들의 표정이 정말 너무나 진지해서 차마 그냥 오기가 죄송할 정도였다. 하기야 노래를 완전히 익혔다 해도 그 당시는 그곳에서 멀잖은 곳에 모친이 병세가 깊어져서 시름시름 앓고 계시는데 내가 무슨 신이 나서 동네 어르신 앞에서 노래를 부르겠냐마는 그분들의 아쉬운 듯 바라보던 눈길이 잊히지 않는다.
이젠 작은 리사이틀(recital)도 해보고 싶다. 나의 노래를 위해 마중물이 되어주었던 음악가 선생님들께 아름다운 노래로 보답해 드리고 싶다. 아니, 골목길에 의자를 내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으신 동네 어르신들 앞에서, 혹은 거리에서 버스킹(busking)을 하면서 나의 노래에 날개를 달아보고 싶다.
오늘은 밤이 깊을수록 더욱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즐겨 부르는 우리 가곡 '별을 캐는 밤(정애련 곡)'을 정성껏 불러본다. 별에서 꿈을 캐어 오듯이.
민순혜/수필가
민순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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