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오 대표변호사 |
피고인은 대학교 교내 지하주차장 출구 쪽에서 정문 쪽으로 운전하다 경비원을 들이받아 사망에 이르게 해 재판을 받게 됐는데,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은 '급발진'으로 사고가 발생해 과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지하주차장에서 시속 10.5㎞의 속도로 우회전하던 차량이 시속 68㎞까지 속도가 증가했고 사고지점까지 차량의 속도는 증가할 뿐 감속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그렇다면 피고인이 약 13초 동안 보도블록, 화분 등을 충격하면서도 가속 페달을 브레이크로 착각하고 밟았다는 것인데, 이러한 과실을 범하기 쉽지 않고 의도적으로 가속 페달을 밟지 않는 이상 이뤄질 수 없는 주행"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어 "당시 차량에는 피고인의 배우자와 자녀가 동승하고 있어 비정상적인 주행할 이유가 전혀 없고 가속 구간에 브레이크 대신 가속 페달을 밟은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운전 경력이 30년 이상으로 짧지 않고 사건 사고 당시까지 단 한 번의 교통 관련 수사나 처벌받은 전력이 없고 신체적 장애가 있다거나 음주 및 약물을 복용해 사고를 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무죄 판시 이유를 들었다.
이는 2008년 대법원에서 벤츠 차량을 몰다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해 10중 추돌사고를 낸 대리운전기사에 대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든다"고 판시하면서 무죄 판결한 이후 '급발진' 의심에 따라 종종 무죄판결이 선고되고 것과 궤를 같이한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난 급발진 의심 사고로, 60대 할머니가 운전하던 차에 함께 타고 있던 12살 손자가 숨졌고 유가족은 차량 제조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민사소송에서 우리나라 법원이 급발진을 인정한 사례는 거의 없다. 2018년 5월 호남고속국도 인근에서 발생한 BMW 차량의 급발진 사건만이 항소심까지 승소해 대법원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반면 미국 오클라호마주 1심 법원은 2007년 도요타 차량 급발진 사고로 숨진 피해자와 유족 등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해자에게 30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도요타 세단 '캠리' 차량이 고속도로 출구에서 급발진하며 장벽에 충돌해 운전자가 중상을 입고 동승자가 사망한 사건으로, 미국 법원이 자동차 급발진 사고에 대해 제조업체의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도요타를 상대로 한 400여 건의 급발진 소송이 제기됐고, 도요타는 1200만 대 차량의 리콜과 소송 합의금 및 벌금 등으로 총 40억 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 비용을 지불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급발진에 대한 민사소송의 결론이 다른 것은 미국의 ‘제조물 책임법’이 입증 책임을 전환하고 있기 때문인데, 입증 책임 전환이란 소송법의 일반원칙을 벗어나 예외적으로 소송을 건 사람이 아닌 상대방이 이를 입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조업자가 제조물에 결함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제조물 책임법도 결함을 추정하는 조항을 두어 입증 책임을 완화하고 있으나, 위 추정규정을 적용받아 '급발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해당 차량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던 중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 손해가 제조업자의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부터 초래됐다는 사실, 손해가 차량의 결함 없이는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 제조사가 관련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아 이를 입증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문제로 현재 국회에서는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는데, 개정안의 골자는 자동차 같은 고도의 기술력이 집약된 제조물에 의한 손해는 그 제조물에 결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제조사가 입증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은 민사소송 원칙에 위배된다고 하면서 제조사 측 편을 들고 있어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민사소송의 원칙에 대한 예외로 입증 책임을 완화하거나 전환하는 특별법이 바로 제조물 책임법이고, 이는 헌법상 권리인 생명권의 보장을 위한 것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종오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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