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공직에서 은퇴 후 손주들과 함께 지냈지요. 부부만 살다보면 웃을 일이 그리 많지 않았을 듯한데, 손주들과 함께 학교·유치원·학원을 오가며 참 많이 웃었습니다. 그 녀석들의 재롱을 보는 즐거움, 군것질을 함께하는 행복함은 '바랄 게 뭐가 더 크게 있겠느냐!' 그런 생각을 했지요. 다소 경직될 수밖에 없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공직생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시간이었습니다. 가끔 모임에 나가면 '얼굴이 편해 보인다. 젊어졌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지요. 마음의 여유가 생겨 그렇게 보였을 듯합니다.
한 달에 한 번은 먼 곳으로 나들이했지요. 자연과 함께하면서 지역의 명승지, 옛 고찰이나 성당 등을 둘러보는 일은 오랜 세월 찌들었던 삶의 더께를 씻어버리고 마음을 정갈하게 했습니다.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 보물 같은 시간이었지요. 입소문난 맛 집을 찾아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산책하듯 돌아다녔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 정말 좋은 곳이 많다는 걸 실감하기도 했지요. 많은 책을 읽고 틈틈이 글을 써 수필집 한 권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순(耳順)을 넘기면서 마음을 비운다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지요. 욕심을 버리고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비로소 전체가 제대로 보이는 것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실, 앞만 보고 달렸던 지난날엔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지요. 나이가 들어 머리가 반백(半白)이 되고 얼굴에 주름이 깊어지니까 뒤를 돌아보게 되고, 잘 보이지 않으면 몇 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삶에 여백을 두어야 또 다른 생각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런 생각으로 살다 보니 남의 허물보다는 내 허물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가진 건 많지 않으나 조금 더 양보하고 베푸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지요. 시간에 쫓겨 허둥대는 일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떠도는 구름처럼 산다는 것, 그게 삶의 지혜이고 경륜(經綸)이겠지요. 노인이 많으면 사회가 병약해지고 어른이 많으면 윤택해진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지요. 어린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들면 '꼰대' 소릴 듣게 됩니다.
욕심을 부려서도 안 되지요. 젊은이의 욕심은 열정이고 야망이 되기도 하지만, 나이 든 사람의 욕심은 노욕(老慾)으로 취급됩니다. 오랜 세월 쌓은 경륜을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참 교훈을 주어야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지요. 때때로 아닌 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바른길로 이끌어주어야 어른으로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이순(耳順)은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뜻이지요. 말을 하는 것보다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합니다. 그게 나잇값이고, 어른이지요. 연륜에 걸 맞는 몸짓으로 여여(如如)하게 살아야지요.
세상을 살면서 지켜야 할 규범과 도덕·윤리가 '인(仁)'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다워야 한다는 말이지요. 남을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 베풀며 사는 것이 사람다운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인(仁)입니다.
홍승표/수필가, 전 경기도관광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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