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우 회장 |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80년 12월 8일 대전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본향인 청주로 이주해 성균관을 졸업 후 교육계몽운동과 논설 기자로 활동하다 중국으로 망명해 치열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민족주의 사관으로 우리나라 근대사학의 지평을 연 위대한 역사학자였다. 또 뛰어난 언론인으로 활약하신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평생을 민족사적 수난과 역경 속에서 살다 간 단재 선생은 오로지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28년 일본 경찰에 피체돼 이국땅 뤼순 감옥에서 1936년 2월 21일 순결한 생애를 마쳤다.
단재 선생의 생가는 선생이 대전을 떠난 후 한국전쟁 이후 사람이 살지 않던 집은 사라지고 돌무더기만 뒹구는 신세가 됐다. 텅 빈 집터는 마늘밭이나 콩밭으로 경작돼 찾는 이 없이 방치돼 오다가 1988년 지역의 민간 향토사단체인 '옛터를 생각하고 돌아보는 모임'에서 생가터를 주민들의 고증으로 찾아내 표지석을 세웠다. 그 후 대전시가 생가터 발굴과 생가 복원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생가터에서는 2007년부터는 단재 선생이 태어나신 12월 8일에 기념 헌화식을 해마다 시민단체들이 주최해왔다. 2022년부터는 대전과 청주에서 각각 해오던 탄생기념행사를 생가지가 있는 대전에서는 탄생기념행사를 사당과 묘가 있는 청주에서는 추모식을 대전과 청주 시민들이 공동으로 행하고 있다. 선생의 위업을 선양하는 일에 시민단체들이 발 벗고 나선 좋은 본보기다.
올해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집필한 의로운 일을 맹렬히 행한다는 취지의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이 세상에 나온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 식민 통치하 강도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한 의열(義烈)투쟁이 절정에 달하던 1923년 1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했다. 100년 전 조선의열단의 행동이념이자 강령으로 발표된 조선혁명선언은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애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했다"는 처절한 상황인식을 첫 문장으로 시작해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통치가 우리 조선 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 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쳐 죽이는 것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라는 명징한 결론을 끌어냈다.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뿐만 아니라 당시 항일투쟁에 나섰던 조선의 모든 독립운동가와 일반 민중에게 독립이라는 확실한 목표와 확신을 가지도록 한 일대 사건이었다. 경제와 안보, 사회, 역사 전반에 걸쳐 복합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조선혁명선언에 담긴 단재 선생의 일성이 우리가 나아갈 길을 비추는 귀중한 지표가 될 것이다.
그간 단재 생가터 표지석 건립과 탄생기념행사를 해오던 대전향토문화연구회 등 시민 단체들은 조선혁명선언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단재 선생의 발자취를 찾는 행사와 단재 선생의 뜻을 기리는 강연 등을 일반 시민 대상으로 개최해왔다. 그리하여 올해는 생가터를 비롯해 사당과 묘소가 있는 청주 일원을 함께 돌아봤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중국답사도 진행해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선생이 순국한 여순감옥과 대련 법정을 돌아봤다. 잊혀진 상고사를 일깨운 집안 일대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환도산성을 바라보며 "김부식의 삼국사기 일만 번 보는 것보다 만주 일대의 고구려유적을 보라"고 하신 선생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를 눈으로 확인했다.
백두산과 드넓은 만주벌판을 달리며 독립을 위해 산화하신 선열들을 생각해봤다. 단동과 도문에서 갈라진 조국의 아픈 현실을 바라보며 만주벌판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독립운동가들에 무한한 부끄러움과 마음속 깊은 죄송함을 느꼈다. 이번 단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간 대전시민단체들의 행보는 선생의 못다 한 위업을 선양하고 이어 나가길 다짐해 보는 역사를 알아가는 새로운 독립운동의 답사였다. /백남우 대전향토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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