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애독자 황수남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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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애독자 황수남 어르신

  • 승인 2023-06-14 09:58
  • 신문게재 2023-06-15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고기
재작년 1월 설을 앞두고 편지 한통을 받았다. 발신인은 대덕구에 주소를 둔 황수남이라고 했다. 모르는 사람인데 누굴까? 봉투를 뜯어 편지지를 꺼내 읽었다. 첫 문장은 '나는 80세가 넘는 나이의 중도일보를 구독하고 있는 대전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입니다'라고 시작했다. 한 자 한 자 펜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글은 정성이 가득했다. 하아, 소싯적 연애할 때 애인한테서도 받아보지 못한 손편지를 독자한테 받아보다니. 어르신은 격려와 응원 그리고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당부했다. 그 후로도 두 통의 편지를 받았다. 어둡고 차가운 바람 속에서 조그마한 성냥불 하나가 길잡이가 되듯 언론이 그런 역할을 해 주기를 누누이 강조했다. 어르신은 텃밭 농사를 지으며 신문도 네 개를 본단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그리고 지방지 두 개. 놀라웠다. 한겨레를 보다니. 노인들은 조선일보만 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황수남 어르신은 균형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두 개의 신문을 본다고 했다.

어르신은 틈날 때마다 전화로 "텃밭에 온갖 채소가 다 있어. 병안이랑 놀러와. 막걸리 한 잔 하자"고 졸랐다(?). 알고보니 후배기자 임병안은 어르신이 아들처럼 생각하는 존재였다. 인연을 맺은 지 10년 됐다고. 오정농수산물시장에서 근무할 때 임병안이 취재 차 처음 와서 육개장을 사줘서 맛있게 먹었다며 후배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지난 금요일 후배와 함께 어르신과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장소가 원신흥동 고깃집이었다. 어르신은 동생처럼 친하게 지내는 분과 같이 왔다.

석쇠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걸 보자 동공이 커지면서 침샘이 폭발했다. 어르신을 뵈었다는 반가움도 잠시, 내 온 신경은 고기에 집중했다. 꽃상추에 고기를 얹고 채썬 양파를 듬뿍 얹어 입안에 욱여 넣고 와구와구 먹었다. 나는 빛의 속도로 먹기 시작했다. 금세 상추가 동나고 채썬 양파를 주문하기 바빴다. 아, 난 왜 맛있는 음식을 보면 언제나 이성을 잃을까.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던져버린다. 새콤한 파김치와 깻잎 장아찌, 묵은지도 기가 막혔다. 고깃집 반찬이 맛있는 건 보기 어려운데. "어머니는 안녕하시고? 우 부장은 집이 어디여?" 어르신이 물었다. "#~*&∞※~~." 입안 가득 든 음식 때문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모두가 웃었다. 내가 고기를 가열차게 먹었나? 후배가 조금 먹더니 더는 안 먹고 밥만 먹었다. 고기를 구워주는 식당 주인도 내 앞에 고기를 연신 놓았다.

황수남 어르신은 고기는 안 먹고 소주만 계속 마시며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역시 주당에 천상 이야기꾼이었다. "내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밭에 가서 저녁까지 일해. 일하다 배고프면 막걸리를 마시는데 참 좋아. 속이 든든혀." 하루종일 쉬지 않고 몸을 움직여서인지 정정했다. 땀 흘리는 육체노동이야말로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란 걸 보여준 셈이다. 얘기는 자연스레 농수산물 유통구조의 문제로 모아졌다. 산지에서는 헐값인데 소비자는 여전히 비싼 가격에 사먹는 현실 말이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점에 다같이 공감을 했다. 어르신은 이런 문제를 언론이 공론화해서 문제가 개선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내가 술잔만 받아놓고 술이 줄어들지 않으니까 어르신이 잔잔한 미소를 띠고 한마디 했다. "요즘은 여자들도 술 잘 먹는 세상인데 왜 우 부장은 안 마셔?" 어르신, 저도 소주 한 잔 들이켜고 캬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부터 누누이 말씀드렸는데 또 까먹었다. 배가 남산만큼 불렀다. 된장찌개와 밥 한공기도 뚝딱 비웠다. 뜨거운 된장찌개와 쌀밥이 고기로 흥분한 내 야성을 살짝 눌러줬다. "다음엔 우리 텃밭으로 놀러와. 감자가 실하게 크고 있어." <지방부장>
우난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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