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피로(Compassion fatigue)'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심리학자 찰스 피글리가 정리한 개념으로, 타인의 과도한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란 뜻이다. 그에 기대면, 연민이나 공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시들어버리기도 하지만 다시 활성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접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피로를 느꼈을 테다. 처음 접한 잔학 뉴스라면 누구나 충격적이겠지만, 이후 또 다른 참상 이미지를 본다면 처음과 같은 극단적인 반응은 보이지는 않을 게다.
물론 연민 피로가 지속적이면 곤란하다.
"연민은 불안정한 감정이다.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들어버릴 것이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2003)에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둔감해지기도 하는 연민을 다시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한 실험에서 비디오 게임, 영화 등 디지털 미디어의 폭력을 통해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이나 폭력에 어떻게 둔감해 지는가를 밝히려 했다. 대학생 320명에게 20분간 폭력과 비폭력 비디오 게임을 하게 하여, 게임 방 밖에서 조교가 싸움에 휘말려 폭력에 신음하는 연출을 하게 했다. 피실험자들이 위기에 처한 조교 돕기에 걸린 시간은, 비폭력 게임 참가자는 16초, 폭력 게임 참가자는 73초였다. 결과적으로 폭력 이미지에 노출될수록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연민 피로로 이어져 현실 세계에서 피폭력자를 도우려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연민 피로가 사회적으로 더 많은 폭력과 혐오 발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는 튀르키예와 요르단의 시리아 난민에 대한 연민 피로와 언론의 부정적 보도가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연구에서도 드러났다. 언론이 난민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와 메시지를 보도하면 독자는 난민에 대한 연민을 잃거나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폭력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로운 사실은 미디어가 얼마나 빨리 연민 피로를 야기해서 혐오 발언과 인종 차별로 이어지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연민 피로는 역전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셜 미디어에 기대어 공감을 이끌어 내기도 하는데, 시리아나 우크라이나 난민 위기를 좀 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경우다. 언론은 난민 위기를 보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기사화하여 비극적인 이야기에 독자의 연민, 곧 "'공포'에 반응하지 않고, '용기' 내기로 결심"하는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또한 언론 기사가 개인이나 정책 입안자들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장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면 독자는 해결 불가한 상황의 수동적 관찰자가 아닌 능동적 실천가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북한은 별난 방식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지진은 예측이 어렵지만 전쟁은 그렇지 않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전쟁에서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언론 보도와 관련 행사를 만나는 달이기도 하다. 멀리는 6.25전쟁, 가까이는 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의 그날을 기억하게 된다. 헝클어지고 왜곡되기도 한 전쟁과 상흔에 대한 무뎌진 공감을 되살리고, 지금도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목숨을 바치는 그분들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성만 배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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