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수원화성, 성곽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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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공론] 수원화성, 성곽길을 걸으며

민순혜/수필가

  • 승인 2023-06-07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나는 온라인상이지만, '생생(생생여행클럽 카페)'에 가입하여 활동한 지 10여 년이 넘었다. '생생'은 회원 상호 간의 친목보다는 중국을 여행하는 데 필요한 항공편, 선박여행 등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둔다. 특히 인천항에서 가까운 산동성 지방인 옌타이, 웨이하이, 칭따오는 내가 선박여행으로 주말이면 자주 갔던 곳이다.

하루는 수원에 사는 닉넴 안프로님이 번개팅을 제의했다. '어느덧 한해가 지나는 늦가을, 수원화성 성곽길 걷기 및 사진대회, 치맥 파티합니다'라고. 그는 책임감이 투철한 편으로 생생에서 중국 여행 인솔도 많이 하는 편이다. 나도 간 적이 있어서 그의 번개팅 제의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일정은 당일 수원역에서 만나 경기도청 뒤, 팔달산 입구부터 걷기 시작, 사진 촬영하면서 이동하되, 시간이 애매하신 분들은 위 시간에 중간 합류할 수 있다. 가급적 카메라나 스마트폰(사진 촬영용) 지참 부탁, 만나는 시간을 해 질 녘 전후로 잡아서 수원 화성의 낮과 밤 두루 감상할 수 있고 힐링 걷기가 끝난 후, 지동시장 및 수원의 명물 통닭 거리에서 치맥 파티, 치맥 경비는 1/N로 한다.

당일 오후 4시. 번개팅 주최자이자 인솔을 자청한 안프로는 집결지인 수원역 1번 출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10여 명의 생생 회원 일행과도 마주했다. 생생회원이라고는 해도 그날은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 외에도 다들 서로 실제 만나는 건 처음인 듯 도로변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자 인솔자가 나서서 각자 간단히 소개하고 앞장서서 걸었다. 일행은 두 명만 여자이고 모두 남자로, 마치 일터로 가는 듯 그들은 뒤 돌아볼 것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실 고행의 시작이었지만, 왠지 내 마음은 설렜다. 복잡한 역 앞을 빠져나와 길 건너 시장 안 먹자골목을 지나는데 어슴푸레한 저녁나절 포차마다 어묵국을 끓이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때까지 먹은 것이라곤 아침에 얼그레이 홍차 한잔과 마늘빵 한 조각뿐이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듯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20분.

"저기요, 인솔자님! 우리 꼬치 어묵 한 개씩~먹고 갈까요?" 말하려는데 일행은 벌써 저만큼 가 있는 게 아닌가. 에쿠!

나는 헐레벌떡 뛰어가자 인솔자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다시한번 인원 점검을 한 후 손으로 여기저기 가리키며 주변을 설명했다. 저쪽은 수원역이고, 이쪽은 어디 어디이고, 가운데 도로는 팔달산이고… 우리는 팔달산으로 올라갔다. 단풍 진 산길을 오르는데 산들바람이 어깨너머로 불며 저녁쯤인데도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자주 숲속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러느라고 좀 늦어져서 일행들은 외지에서 온 나를 떼버리고 갈 수가 없었는지 가다가 멈춰 서서 나를 계속 기다려서 지금도 생각하면 미안하다.

사실 우리는 이 신선한 공기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틈만 나면 자연을 찾아 떠나는 이유도 그 신선한 공기를 찾아서가 아닐까. 아니, 그보다도 연일 단조로운 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변화를 기대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여행일 것이다. 그러니 어느 날 문득 배낭 하나 짊어지고 훌쩍 떠나보는 것! 어딘가 인적이 드문 시골길을 정처 없이 걸어보고 싶은 건 도시인의 로망인 것 같다. 거기에 편승해서 나는 오늘도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음뿐 실제 여행을 떠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이처럼 역사 탐방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돌아보게 되었으니 인솔자에게 그저 고맙다는 말만 수없이 되뇌었다. 우리는 팔달산 입구에서 얼마를 더 올라가자 수원화성 관광안내소가 보였다. 인솔자는 한 번 더 인원 점검을 했다. 총 12명, 단출했지만 늦가을로 각자 두꺼운 옷을 입고 중형 디카에 중무장해선지 얼핏 보면 방송사 역사탐방 촬영팀 같았다.

성곽을 따라 걸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효자 정조의 얼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건축물 들, 하지만 돌로 된 높은 층계를 걷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주변 경관을 보다보면 좀 더 걷고 싶었다. 때마침 가을의 절정에서 단풍과 어우러진 석조와 목조로 된 관문들을 통과하며 또 한 번 기염을 토해내니까 말이다. 서장대, 팔달문, 서포루, 화서문, 장안문 등….

어느 만큼 걸었을까. 다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날은 어둑해져서 성곽 조명이 켜지고 금세 어둠이 내려앉았다. 저만치 도로에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가 환하게 비추며 왕래가 빈번했다. 일행은 누구 하나 피곤한 기색이 없다. 인솔자는 앞과 뒤를 오가다가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묻는다. "피곤하시지요?" 나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피곤하긴요, 괜찮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상태와는 반대로 대답했다. 나는 아침에 얼그레이 홍차 한잔과 마늘빵 한 조각 먹은 것이 그날 먹은 음식의 전부였으니 사실 힘이 없을 만도 했다. 몸은 지치지만, 캄캄한 성곽길을 환히 비추는 조명은 신비스럽기만 했다.

그 길을 따라 한참 가는데 앞이 어두컴컴해져서 주변을 돌아보니 캄캄했다. 나는 그곳이 하산하는 지점인가 해서 한숨 돌리려는데 앞서가던 일행 몇 명이 불렀다. 그중 한 분이 배낭을 열고 뭔가 한 조각 꺼내 쥐여 주는데 구운 쥐포였다. 소주 한 방울과 쥐포! 나는 배고픈 참에 덥석 받아서 한 모금 마셨더니 순간 어찔했다. 그때 그 소주 맛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힘을 내서 걷는데, 다시 돌층계가 나오자, 내 중심이 흔들려 보였든지 옆에서 걷든 남자 회원이 살며시 손을 내밀며 내 핸드백을 들어주겠다고 하신다. 정말이지 일면식도 없던 우리 생생회원들의 따스함이 몸속 깊숙이까지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오래전 중국으로 시장 조사를 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강행군을 했던 시절, 무거운 짐을 들고 그 높은 선상에 어떻게 올라갔던지… 그때도 우리들은 너나없이 서로 짐을 들어주었다.

공식 행사는 아니었지만, 그날 몇 년 만에 수원화성 성곽길을 함께 걸으면서 만감이 교차했던 것도 그러한, 여행자들만의 끈끈한 정감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바쁜 시간 중에 아무 보답도 없는, 수원화성 성곽길 탐방을 기획한 인솔자에게 진정 감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여행이 준 선물인 셈이다.

뒤풀이 때 수원의 명물 통닭 거리에서 치맥 파티도 감동이었다. '진미통닭'에서 통닭, 프라이드, 생맥, 소주는 몽땅 '생생여행클럽' 이사님이 쾌척! 정말 고맙고 맛있었다. 그날 인원은 몇 명 되지 않았지만, 헤어질 때까지도 서로 다음 여행지에서 만나기를 약속하며 여행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던 건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밤 9시 수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오면서 마음이 흡족했다.

11월 늦가을, 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던 추억은 내게 잊을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시간임은 말할 것도 없다.

민순혜/수필가

민순혜 수필가
민순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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