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균 단장 |
19세기 후반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 시행은 전국의 의병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날로 몰락하는 나라 구하기 운동에 백성들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이인영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심상치 않던 부친의 병세였다. 나라의 운명도 부친의 운명도 촌각을 다투고 있었다.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이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모 자녀의 정이 경한데 어찌 공사를 미루리오"라고 설득하자, 이인영은 부친과 작별하고 의병 총지휘관으로 서울 진공 작전에 나섰다. 1907년 곳곳의 의병들을 모아 연합부대를 결성하고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이 되어 서울로 진격 작전을 펼칠 때 부친 사망 소식을 접했다. 충과 효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이인영은 효의 현장 고향 집으로 달려갔다. 이후로 의병부대는 퇴각하고 결국은 패하고 말았다.
효의 현장으로 달려간 이인영은 삼년상을 치르다 그만 일제 헌병에 잡혔다. "어찌 전장의 최고 지휘관이 부친이 돌아갔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헌병의 비아냥에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것은 짐승과 같고 짐승은 신하가 될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이 불충인 것이다"고 당당히 답했다. 공적 책임자가 사적 업무로 자리를 뜰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인간의 당연한 도리가 공적 업무의 기본이 된다는 효 우선의 논리로 응수했다.
전혀 다른 사례도 있다. 세종 때 김종서 장군 얘기다. 장군은 두만강 동북지역에서 여진족을 정벌하고 국경에 6진을 설치, 오늘날의 국경선을 정립한 인물이다. 장군은 오랜 세월 최전방지대에 있으면서 효를 다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마침 노쇠한 모친 봉양을 위한 사직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국방의 위중함을 들어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세종은 단지 충을 우선하며 효를 무시한 게 아니었다. 장군의 모친에게 직접 약과 음식을 내려 치료하도록 선처했다. 충신의 효를 나라에서 대신한 것이다.
최전방에 있던 장군이 잠시 휴가를 내어 모친 병환을 돌보고 있을 때의 일이다. 모친은 "너는 빨리 네 직책으로 돌아가라. 네가 능히 성상께 충성을 다한다면 나는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이다"고 하며 아들을 돌려보냈다. 어머니의 이 말은 충과 효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장군의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나라의 중차대한 책무를 맡고 있는 신하가 충성을 다함은 마땅한 도리이다.
하지만 병든 모친 봉양을 뒤로한 채 국경으로 달려가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자녀의 도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이때 어머니의 "돌아가라"는 이 한마디 말은 충효를 아우르는 결단이었다. 돌아가는 것이 나라에 대한 충이고 자신에 대한 효라는 것이다. 결국 모친의 이 한마디는 세종(王), 어머니(母), 김종서(子) 삼자의 미묘한 충효의 입장 차이를 극복하고 아우르는 중요한 단서가 됐다.
충과 효, 무엇이 먼저이고 나중일까? 상황 따라서 달리 봐야 하지 않을까? 핵심은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충과 효에는 피아(彼我)가 있다. 본인도 중하지만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모와 군주, 국가 입장에서 보면 무엇이 우선인가 분명해진다. 부모 입장에서 전장을 등지고 고향길을 택한 지도자의 선택, 과연 부모가 반겼을까? 아니면 "(현장으로) 돌아가라" "나라 위해 끝까지 싸워라"라고 했을까? 6월 호국보훈의 달, 개인주의가 판치는 이 시대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김덕균 한국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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