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은 거실에서 어설픈 잠을 잤지만 어제는 방에 들어가서 제대로 잠을 잤다. 단잠 덕분인지 몸이 한결 거뜬하고 머리까지 맑았다. 어김없이 울리는 알람 신호는 날 새벽 4시에 깨웠다. 하지만 따뜻한 전기장판에 매료되어 게으름 떨다가 많은 시간이 경과됐다.
궁싯거리다 일어난 시각이 평소보다 1시간 반이나 늦었다. 새벽기도 시간이 다 달아났다.
못한 새벽기도는 저녁에 하기로 하고 그대로 운동을 나갔다. 도솔체육관까지 걸어서 30분, 어둑어둑한 거리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이따금 만나는 환경미화원 아저씨한테 "수고하십니다"의 한 마디 인사로 적막을 깨뜨렸다.
주변을 청결하게 쓸어서 담곤 하는 아저씨가 위대해 보였다.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주변은 물론 마음까지 깨끗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맑은 하늘에 환경미화원 아저씨를 떠올리니 이희승 님의 <벽공(碧空)>이라는 시조가 떠올랐다.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
새파랗게 고인 물이
만지면 출렁일 듯,
저렇게 청정무구(淸淨無垢)를
드리우고 있건만.
-이희승-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울고 웃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의 청정무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에 동화되어 속화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핏줄 형님 같은 이용만 선배와 배드민턴을 1시간이나 쳤다. 도솔산길로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 벌써 집 문 앞에까지 와 있었다.
문을 열려다보니 문짝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검정 비닐 봉 한 개가 시선을 자극했다. 누가 갖다 놓았는지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짐작이 갔다. 그런 일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분은 바로 옆 라인에 살고 있는 김종복 여사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묵직한 비닐봉지를 열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어떤 힌트도, 쪽지도, 없었다. 다만,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내가 좋아하는, 연한 호박잎 스무 잎, 탐스런 가지 몇 개, 햇밤 산밤 한 되쯤 돼 보이는 정성과 사랑의 뭉치가 날 울리고 있었다.
검정비닐 봉 속에는 물건이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바로 세상에선 그 누구도 받을 수 없는 정성이, 사랑이, 숨 쉬고 있는 거였다. 순간 코끝이 찡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황제도, 제왕도, 누리지 못하는 행복감을 맛보는 뿌듯함이었다.
문짝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검정 비닐 봉지 한 장!
거기엔 호박잎, 가지, 알밤이라기보다는 오직 하늘이 보낸 천사의 마음이, 정성이, 사랑이, 쌔근쌔근 곤히곤히 숨 쉬며 똬릴 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은 돈이나 권력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세상의 혹자는 엄청난 돈을 쓰고서도 세인의 구설수에 올라 비난을 받는 사람도 있다.
거기엔 틀림없이 진정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냄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거기엔 따듯한 가슴을 느낄 수 있는 정성과 사랑이 아닌, 의도하는, 그 무엇을 위한 표백될 수 없는, 검은 속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검정 비닐봉지 한 장이, 코끝 찡한 감동으로, 지나간 삶을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갖게 했다.
천사는 3년 전 내가 하모니카를 배우러 다닐 때 거기서 총무를 보던 분이었다. 내가 사정으로 하모니카 교습을 그만둔 지 2년이 되는 어느 날, 우연히 그 천사의 교통사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안 됐다는 생각에 입원해 있는 병원 한 번 찾아간 일밖엔 없는데, 천사는 수시로 날 울컥하게 하곤 했다.
그녀는 워낙 천성이 착한 분으로 사회 봉사활동을 많아 하는 분이시다. 음지에서 불우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쉴 새 없이 뛰는, 보살 같은 분이시다. 수화를 배워 시청각 장애인이나 농아들을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는 지상의 천사이시다. 수화 통역을 해서 얻은 수익금 모두를 장애인을 위해 써 달라고 내놓는 천연기념물 같은 분이시다.
나는 이런 보물 같은 분을 알고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마냥 흐뭇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 여인이, 정성을 갖다 놓은 천사로 짐작되기에 전화를 했다. 울컥하는 심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염화미소(拈華微笑)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마냥 따뜻한 가슴이 좋아,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었다.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검정 비닐 봉지 한 개!
그것은 바로 울컥하는 마음을 걸어 놓은 거였다.
나도 천사처럼 그렇게 기림의 대상으로 살라는 신호였다.
그저 그저 따뜻한 가슴의 나이테를 더하라는 하늘의 주문이었다.
그건 바로 계시처럼 주문대로 해 뜨는 모든 날, 울컥하는 감동으로 살라는 하늘의 일깨움이었다.
남상선/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전 조정위원
남상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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