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천 교수 |
그러다가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려서 우리말을 적었는데, 이를 차자(借字) 표기라고 하며 이두와 구결, 향찰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한자를 응용하여 우리말을 온전하게 표기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언문 불일치에서 오는 문자 생활의 불편함은 한글의 창제를 통해 극복될 수 있었다.
한글 창제는 한국어를 자유롭게 적을 수 있는 언문일치 시대를 알리는 역사적 쾌거였지만 언문 불일치의 언어생활은 한글 창제 이후에도 지속 되었으며, 이 시기 우리의 문자 생활은 여전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글이 문자 생활의 전면에 서서히 부각 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중에서 한글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된 영역은 한글 간찰이었다.
오늘날 편지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한글 간찰을 언간(諺簡)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언(諺)'은 이른바 '언문(諺文)'을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 문자인 한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추거나, 속되게 부르는 의미가 아닌 대립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한글'의 다른 이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한글 간찰 곧 언간은 옛사람의 한글 편지이며,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한편 언간이 옛 무덤에서 출토되고 본격적인 역주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학계와 사회적 관심이 확대되어 갔는데, 2011년 5월 3일에 대전시 유성구 금고동 산 110-3번지 안정 나씨 묘역을 이장하는 중에 신창 맹씨의 목관에서 복식, 유물 약 40점을 수습하면서 언간 2건이 함께 출토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이 언간은 남편인 나신걸(1461-1524)이 부인인 신창 맹씨에게 1490년경에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글이 창제된 지 얼마 안 되어 지방의 한 부부 사이의 편지라는 점과 특히 남성에 의해 한글로 쓰였다는 점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한글의 보급과 확산이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헌 자료다. '나신걸 언간'에는 남편이 함경도 변방에 군관으로 나가 있으면서 부인에게 의복을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또한 농사일과 집안일을 당부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런데 유독 눈길을 끄는 부분은 편지 내용에 "또 분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가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고"라고 하여 '粉하고 바늘 여섯 개를 보내며, 집에도 못 가니 민망한 일'이라고 하여 멀리 변방에 나가 있는 남편이 회덕 집에 있는 아내에게 애틋하고 절절한 마음을 전하는 대목에서는 오늘날 부부의 정서에 비교해 더욱 훈훈하고 도탑다.
'나신걸 언간'은 2012년 5월 가정의 달, 그중에서도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날을 기념하여 정한 21일 '부부의 날'에 공개됨으로써 530년 전 부부의 살가운 정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대전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나신걸 언간'을 최근 문화재청에서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함으로써 언간이 한글 반포 이후 언어생활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다시 한번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한 때에 대전시립박물관에서 3월 24일부터 5월 28일까지 '나신걸 언간'을 전시 중이어서 반갑다. 특히 대전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 동춘당 송준길 가문의 선비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낙향 후 고향 회덕에서 여생을 보낸 제월당 송규렴 가문의 삶과 문화를 품고 있음을 언간을 통해 알려주는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고장이어서 뜻깊다. 언간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언어와 생활문화에 스며있는 지혜와 성찰을 살펴보는 이유가 분명한 오늘이다.
/백낙천 배재대 국어국문·한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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