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밍하고 허여멀건한 냉면. 그런데 왜 냉면, 냉면 하는 걸까. 냉면은 나한텐 관심 밖이었는데 이욱정 PD가 방송에서 한국의 면 요리 중 평양냉면을 으뜸으로 쳤다. 음식 다큐 '누들로드'를 찍으면서 세계의 모든 면 요리를 먹어본 이욱정이 칼국수가 아닌 냉면을 애정한다고? 내로라하는 유명인사들도 평양냉면을 최고로 꼽는다. 파스타 전문가 박찬일 셰프는 현재 아예 냉면을 팔고 있고 작고한 최인호도 냉면이라면 매일 먹어도 안 질릴 정도라고 했다. 또 한 사람. 베르톨루치 영화 '마지막 황제'의 OST를 만든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 몇해 전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차 '씨네21' 인터뷰에서 한국에 올 때마다 냉면을 즐겨 먹는다고 했다. 냉면, 뭐냐 넌!
얼마 전 가족 외식을 했다. 장소는 사리원면옥. 조카가 근로자의 날을 맞아 회사에서 상품권을 줬다며 한 턱 쏘겠다고 해서 대전에 모였다. 사리원면옥은 황해도 출신 김봉득씨를 시작으로 지금은 손자가 운영한다. 아침에 고기를 먹은지라 우리 테이블은 냉면과 만두를 시키고 엄마는 만둣국을 드시게 했다. 엄마는 컨디션이 좋으면 으레 '좋아졌네, 좋아졌어. 몰라보게 좋아졌어~'를 흥얼거리신다. 옆 테이블 남자 가족들은 불고기와 냉면을 주문했다. 도대체 냉면의 그 맛이 뭘까. 천하의 먹쟁이가 냉면 맛을 모른다면 스타일 구기는 것 아닌가. 먼저 온육수가 담긴 주전자가 나왔다. 따뜻하고 구수했다. 궁금했다. 진짜 고기 육수일까. 냉면은 육수가 생명이라는데. 드디어 냉면 대령이렷다! 편육 두 점, 계란 반개, 배 한쪽이 살포시 얹어 있었다. 종업원이 가위를 갖다 줬으나 자르지 않고 면을 집어 올려 입안 가득 먹었다. 살짝 쫄깃한 것이 메밀에 전분을 섞은 것 같았다. 이번 냉면은 젓가락질 여덟 번 정도? 맛도 양도 나쁘지 않았다. 다음에 또.
냉면도 세월 따라 많이 변했다. 지금은 100% 메밀 면은 찾기 힘들다. 인스턴트 냉면도 나오는 세상이다. 육수도 소, 돼지, 닭으로 국물을 낸다. 거기에 MSG도 살짝 추가. 회식할 때 고깃집에서 후식으로 나오는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육수는 백퍼 MSG다. 또 애주가들은 냉면 먹는 공식이 있다. '선주후면'. 먼저 술을 마시고 냉면을 먹는 것. 냉면이 정치적 소재가 된 적도 있다. 2018년 평양서 남북회담이 열렸을 때 만찬장에서 북한 인사가 남측 재벌 총수들에게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 갑네까?"라고 해서 화제였다. 정치적인 발언이냐, 북한식 어법이냐 설왕설래했었다. 한국의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백석 시에도 냉면이 등장한다.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평양냉면은 원래 겨울음식이었다. 매서운 추위에 잘 삶은 메밀 면에 살얼음 뜬 동치미 국물을 부어 뜨뜻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먹어야 제 맛이라고 한다. 언제 이런 진국을 평양의 겨울밤에 먹어보려나. 후루룩 쩝쩝. <지방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