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에 사용하기 위해 특별히 공들인 탓일까? 제기 모양은 아름답다. 삼십여 년 전까지 제사에 목기를 사용하였는데 퍽 인상적이었다. 모양도 모양이지만, 그대로 드러난 나무 나이테의 우아한 무늬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세상에 쉬운 일이 있으랴만, 목기도 쉽게 탄생되지 않는다. 우선 재질이 단단하고 고운 무늬가 있는 나무여야 한다. 오리나무나 물푸레나무가 선택된다. 성장이 멈춘 늦가을이나 겨울에 채취한 나무가 좋다. 기왕이면 고산지대에서 자라야 한다. 일정 건조기간이 지나면 목기 만들기에 적합한 크기로 자르고 수피를 제거한다. 갈이틀(선반)로 초벌 깎기를 한다. 옻나무나 가시나무 수액에 담가 고루 배이게 한 다음 건져내어 음지에서 말린다. 이 때 갈라진 것은 폐기하여 화목 등으로 사용한다. 재갈이 한 다음, 옻칠을 한다. 얇고 고르게 여러 번 바르는 것이 관건이다. 대여섯 번 칠한다. 예전엔 붓으로 칠 했으나 이제 분부기를 사용한다. 옻은 방수와 방열, 방충효과가 뛰어난 명품도료이다.
무거운 탓에 나무 옮기기도 쉽지 않다. 첨단 공작기계가 많이 나와 있지만, 자동톱과 선반 정도만 사용한다. 매순간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목수 손은 손가락이 다 붙어있는 경우가 드물다. 다 붙어있어도 틀어지거나 마디가 굵어져 보기 흉하다. 톱밥과 나무먼지도 만만치 않다. 먼지가 온몸에 뒤덮이고 콧구멍에 가득하다. 목에도 걸려있다. 나무라서 그런지 폐에 영향을 주진 않는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옻은 어떠한가? 잘 못 만지면 간지럼에 시달리고 상처로 남는다. 하나하나가 극한 작업이다.
조영석은 화가 정선(鄭敾), 시인 이병연(李秉淵)과 이웃해 살며 교유하고 시화를 논하였다. 인물화에 두각을 나타냈다. 덕분에 1735년 세조 어진 모사 명을 받았다. 기술로 임금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란 생각 때문에 사양하였다. 때문에 수개월 옥고를 치르고 절필하였다. 1748년 숙종 어진 도사(肅宗御眞圖寫)의 감동관(監董官, 감독관)으로 참여하라는 명에 따라 결국 감동이 되었다. 윤두서와 더불어 조선 후기 풍속화를 이끌었으며 관찰과 사생을 중히 여겼다.
그림은 풍속화, 영모화, 초충도 15점을 묶은 《사제첩(麝臍帖)》에 실려 있다. 사제는 사향노루의 배꼽이다. 화첩 그림은 완성도가 제각각이다. 때문에 그리다 만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수작도 있다. 습작을 모아 놓은 것인지 표지 한편에 이렇게 써놓았다, "남에게 보이지 말라, 어기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勿示人, 犯者非吾子孫.)"
각설하고 그림을 보자. 나무 아래, 윗옷을 벗어젖힌 두 사람이 작업에 열중이다. 벗은 옷은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 살랑살랑 바람에 나부낀다. 한 사람은 나무틀에 지탱한 갈대로 나무를 깎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회전축에 피대를 걸어 돌린다. 두 사람 모두 깎이는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한쪽엔 날이 다른 갈대, 끌, 자귀 등이, 맨 앞쪽엔 탕개톱이, 그 사이에 깎아 놓은 것으로 보이는 제기가 서너 개 보인다.
그림에는 힘든 내용과 과정이 없다. 그 이면에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는지 모두에 언급한 내용으로 그려보자. 제사는 앞사람의 뜻을 기리고 받들며 은덕에 감사하는 일이다. 감사 대상이 어디 선조뿐이랴? 우리는 누군가의 수고로움으로 아름다움과 안식을 즐긴다. 매사에 감사해야 할 이유다.
양동길/시인, 수필가
양동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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