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정 대전자양초 교사 |
"가야지, 네가 선생님인데?"
반전의 유머로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기획이겠지만, 어느 제약회사의 광고 문구는 꽤 오랫동안 내 뇌리에 남았다. 아마도 학기 초 담임으로서 고된 학교생활의 속내를 들켜서가 아닐까? 학급 아이들과 처음 마주하는 긴장과 설렘의 시기가 지나고 어느덧 훈풍이 느껴지는 5월이 다가온다. 각종 행사는 물론이고 "띵동띵동" 메신저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학교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었던 3월은 부지불식간에 사라졌다. 예쁜 봄꽃을 만끽하지 못하고 열심히 달린 시간이 왠지 억울해서 자체 보상이라도 하듯 충동적으로 야외 페스티벌 티켓팅을 해버렸다.
그렇게 주말을 틈타 일탈을 꿈꾸며 찾아간 야외 페스티벌. 그런데 주제가 하필 '학교'가 아닌가! 학교를 탈출해 찾아간 곳이 다시 학교라니….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말이 묘하게 어울려 실소가 나왔다. 커다란 교문 안쪽으로 불량식품 부스와 추억의 오락실, 그리고 포토존으로 마련해 놓은 비현실적 분홍색 교실이 보인다. 드레스 코드인 교복과 체육복을 입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저들 중 누군가는 학창 시절에 수업을 따라가기 버거웠거나 학교 시스템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사람도 있었을 텐데 여기서는 어째 모두가 즐거워 보이네?' 하는 엉뚱한 호기심이 들었다. 자문자답하자면, 아마도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 학교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기에 추억이 깃든 학교의 모습만 기억하는 게 아닐까?
"선생님, 잘 지내고 계시죠?"
"4학년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했어요."
2003년 가르쳤던 제자는 어느덧 20대 청년이 되어 같은 학교의 교직원으로 왔었다. 4학년이지만 학급 문집에 한 줄 소감 쓰기를 할 수 없어서 한글을 다시 찬찬히 깨우쳐야 했던 그는 소위 느린 학습자였다. 친구들이 가버린 교실에 남아 보충학습을 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무척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느린 학습자들은 담임들의 아픈 손가락이기에, 지금도 방과 후 공부를 할 때 너무나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면 교사로서 자괴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학교를 싫어할까 봐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즐겁고 행복했다는 보충학습 경력직(?) 제자의 문자 한 줄은 신기하게도 큰 위로와 희망이 된다.
우리 학교는 기초학력 선도학교이자 연구학교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학습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교육 회복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급증하면서 학교 현장에도 기초학력 정책을 반영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우리 학교가 있다. 학교 밖에서 보면 별 변화 없이 무료한 곳이 학교지만 사실 학교는 현실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가장 변화무쌍한 곳이다. 소규모 학교 특성상 개인의 업무량으로 쉴 틈이 없는데도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기초학력 사업에 열정적으로 참여한다. 저마다 배움의 속도는 다르지만, 우리 학교의 느린 학습자들은 교사의 관심과 손길을 든든한 디딤돌 삼아 오늘도 조금씩 성장하는 중이다.
오늘도 방과 후에 두 명이 남았다. 책상을 붙여 놓고 옹기종기 앉아서 공부를 시작한다.
"쌤, 사실 축구 하러 못 가서 짜증 났는데요. 이렇게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좋아요"도 아니고 "나쁘지 않아요"인데 물색없이 웃음이 나온다. 일주일에 두 번, 이 짧은 만남으로 기적처럼 교육 격차가 회복될 거라 여기진 않는다. 그러나 배움이 느린 학생들과 긴 호흡을 함께 하는 인고의 시간, 이것이 조금씩 쌓여 훗날 그들이 학교는 즐거운 곳이었다고 믿게 만드는 마법이 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우리 학교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교육 회복에 애쓰며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고 계실 모든 선생님께 진심으로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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